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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2)-끝나기 전에 끝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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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2)-끝나기 전에 끝장을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2.10.19 1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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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작정하고 덤비는 사람이 있다. 잘못했다고 하면 그러면 다냐고 따지고 보상하겠다고 하면 나를 뭘로 보느냐고 눈을 부라린다.

급기야 주먹이 날아오고 발길질이 시작된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막무가내다. 잘잘못과는 상관없이 상대를 약 올린다.

잔뜩 독이 오른 가을 독사 앞에서 나뭇가지로 장난질을 친다. 피하고 달아나면 쫓아가서 이래도 안 물래? 하니 동면에 들 시간이 지났음에도 숨긴 이빨을 독사는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에드워드 올비의 희곡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의 주인공 마사는 싸움꾼이고 마지 못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이빨을 드러내는 독사는 그의 남편 조지가 되겠다.

조지는 마사를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이때는 맞받아쳐야 한다. 그러나 조지에게는 그럴 힘이 부족하다. 천성이 그렇기도 하지만 마사 아버지 즉 장인이 대학 설립자이며 총장이고 자신은 그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이니 주종의 관계가 명확하다.

총장의 딸에게 일개 교수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그렇다고 해도 이런 것은 너무 심하다. 그녀 나이 52세고 조지는 그보다 6살 어린 46세라고 해도 그렇다. 마치 미친 엄마가 철부지 아들을 어르고 달래다 회초리를 드는 꼴이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마사가 뱉는 말은 얼마나 저급한지, 독자는 물론 관객이라면 혀를 차게 마련이다.

속으로 독한 년, 나이가 많고 세력이 강하다고 해서 어린 남편에게 저렇게까지야 할 게 뭐람, 하고 분노를 일으킨다.

밥맛이라거나 끝내주는 머저리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빈칸이며 제로이며 못난 인간이나 겁쟁이, 떨거지, 아이 정도도 봐줄 수 있다.

그러나 개자식, 엿 같은 새끼라면 도를 넘었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나이 어리고 총장 딸이라고 해도 돼지나 날강도로 몰린 조지는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릴 수밖에 없다.

술은 저 혼자 먹었나. 같이 취한 주제에 이제는 서로 막나가는 것이 순리다. 잘못했다고 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조지도 대학교수씩이나 하니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간다.

괴물이나 짐승이나 갈보라고 이를 간다. 이 부부의 삶, 막장이다. 끝나기 전에 끝장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부부가 등장한다. 막 신입 교수로 들어온 닉과 그 젊은 부인 허니다.

생물학과를 담당하는 닉은 28살이고 허니는 26살이다. 두 부부에 비하면 이들은 삶의 애송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사랑하는 젊은 부부처럼 보인다. 아껴주고 다독여 주는 그런 관계.

그러나 자세히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남들 눈치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젊은 부부가 술이 떡이 된 마사 부부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뜨악했으나 이들은 곧 분위기에 익숙해 진다. 술 먹고 놀고 허튼수작하는 데에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 새벽 2시쯤 방문한 닉과 허니는 주는 대로 술을 먹고 주지 않으면 알아서 위스키를 마신다.

▲ 죽자고 욕설을 하고 싸움을 걸면 피할 방법이 없다. 받아 주고 맞받아 치는 수밖에. 이런 조리없는 부조리는 독자나 관객의 기분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 죽자고 욕설을 하고 싸움을 걸면 피할 방법이 없다. 받아 주고 맞받아 치는 수밖에. 이런 조리없는 부조리는 독자나 관객의 기분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네 명의 남녀는 동터 올 때쯤 ‘떡 실신’한 상태를 한참 지났다. 네 명 무도 엉망진창이다. 나이에 비해 풍만한 마사가 젊고 몸매가 좋은 금발머리 닉을 노린다.

처음에 피하던 닉은 마사의 대시에 젊은 혈기를 감당하기 어렵다. 허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 혹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마사와 닉은 수작에 열중이다. 조지는 알면서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한다.

조지도 정도는 있지만 허니에게, 허니도 조지에게 호감을 보이나 둘은 더 깊은 관계로 나가는 못한다. 그러나 돌아가는 꼴은 그런 분위기다. 그 와중에도 독설은 이어진다.

서로는 서로에게 아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말에 말꼬리를 잡고 싸움질이다. 부조리도 이런 부조리가 없다. 마사와 조지는 날이 밝기 전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닉과 허니는 이런 게임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대학교수나 하는 먹물들의 놀고 자빠지는 개싸움은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끝날 수 있을까.

참, 해도 너무한다. 이런 저급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미국식 희곡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나 <밤으로의 긴 여로> 등에서 이미 경험 한 바 있다. (이 연재물에서 다뤘다. 이 와는 조금 다른 <세일즈 맨의 죽음>도.

끝장보기 게임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연극으로, 인생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살아남아 오늘날도 무대에 활발하게 올려지고 있다. 

: ‘누가 두려워하랴, 커다란 나쁜 늑대를’ 이란 제목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로 번역됐다.

아기 돼지 삼형제의 기세가 정작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공포로 변하는 허세의 노래가 제목과 잘 어울리는지 어떤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고 베티 데이비스의 눈을 노래한 킴 칸스의 ‘베티 데이비스 아이스’를 들어보자. ( 1막 첫 장에 이름이 언급된다. 그녀는 그레타 가르보 이후 1930-40년대 할리우드를 풍미한 유명 여배우였다. 노래는 1981년 발표됐다.)

경쾌하고 발랄하다. 언제나 리듬이 살아 있다. 주사위처럼 굴리거나 빵부스러기처럼 던져진다고 해도 그녀의 커다란 눈을 보면, 표독스럽고 스파이같은 짓을 한다고 해도 마음은 봄 눈 녹듯이 녹아내린다.

조지에게 마사는 그런 여자인가. 조개껍데기 속의 상냥한 그녀로 마사는 돌변하고 그래서 조지의 따뜻한 위로를 받아들일까. 괜찮아, 하고 다정하게 어깨얹은 손을 뿌리치지 않을까.

지금까지 벌어진 그 모든 어릿광대 짓을 용서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까. 까만 어둠을 한 줄기 빛으로 비출 수 있을까. 잠시 그럴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희망을 보여 줬지만 독자나 관객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정작 두려워 할 것은 버지니아 울프( 늑대 Wolf와 작가 이름 Woolf의 발음이 같다.)가 아니라 술없는 마약없는 환각없는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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