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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병력 규모를 조직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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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병력 규모를 조직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0.1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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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석에게는 다 속셈이 있었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일제의 눈을 피해 조선인들이 상해에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베이징이나 다른 도시로 가는 인원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도착한 곳이라 해도 먹고 사는 문제는 흉흉했다. 이곳도 일제의 감시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쟁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이었다. 젊은이들은 세상 어디나 일제 때문에 살 수 없다고 한탄했다.

일제에 대한 반감이 깊어 갔고 여기서 이 고생이면 차라리 고향에서 하는 것이 낫다는 자조가 일어나기도 했다. 일부는 다시 돌아가기도 했고 여비만 마련되면 그러겠다고 결심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여비만이지 조금이라도 손에 쥐고 가야한다. 빈손으로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임정은 그런 청년들과도 접촉했다. 새로운 병력으로 충원하는데 가릴 이유가 없었다.

일제에 반감이 있고 이국을 전전하면서 생긴 애국심이 고조된 그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면서 기회를 엿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 다 받을 수는 없었다.

숫자에 집착하다 보면 조직의 누설 등 되레 큰 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의협심이 강하면서 날래고 배움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가하면 독립운동이 목적 그 자체인 청년들도 다수는 아니어도 간혹 있었다. 조선독립군의 문을 제발로 두드리는 가상한 청년들은 무엇보다도 든든한 임정의 원군이었다.

그러나 그 수는 손가락을 셀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러다 보니 천 명이 넘는 인원을 채워 연대를 구성한다는 계획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그래도 미룰 수 없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 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일제는 세를 확장하기는 했지만 외부의 저항 역시 그에 맞서 강해지고 있었다. 조선민들의 민심은 벽으로 보였던 일제도 타고 넘을 수 있는 담장일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무장투쟁 뿐만 아니라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 조선어 사전 편찬 등 뿌리를 찾기 위한 작업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글로써 조선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안가로 돌아온 주석은 비밀리에 조선 독립군 모집에 들어갔다. 어떤 때는 드러내 놓고 소문이 퍼지기를 기대하는 눈치를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해 볼 만 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첫 번째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지자 제2, 제 3의 공격을 가능하게 했다. 모집책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시장바닥을 훑듯이 세몰이에 나섰다. 이런 소문은 한인촌은 물론 다른 조계지에 퍼졌고 당연히 일경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바심을 낸 그들은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아무나 잡아 불심검문을 했다. 그러나 잡고 나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민심만 흉흉해졌다.

먹기 위해 와서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하는 자들을 다 잡아들일 수는 없었다. 일경은 원점을 타격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총구는 하부가 아닌 상층부를 겨냥했다.

포목점을 드나드는 횟수가 부쩍 는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두목을 잡으면 지금보다 열배나 큰 포목점을 주겠다고 배불뚝이에게 미끼를 깔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주인은 무언가를 줄 듯 말듯하면서 일경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가 성격이 그래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은 일제가 지목한 두목을 접선하는 일은 그 역시도 어려웠다.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정보를 줄수는 없었다. 주인은 혼란한 와중에 자신이 무엇가를 하는 중심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임정의 근처에서 혹은 일제의 첩자로 어중간한 지점에서 그는 서성였다. 양쪽에 한다리씩 걸쳐 놓고 저울질 하는 그의 습성을 일제도 알고 있고 임정도 알고 있었다. 

한편 말수는 그날 이후 포목점을 찾지 않았다. 병원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는 한 달 전 쯤 온 저녁 초대를 거절하기도 했다. 멀어지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병원은 바쁘게 돌아갔다.

환자는 끊이지 않았다. 봄이 오면 병원을 신축해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의 이층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의사도 두어 명 더 써야 했다. 부부는 그런 문제로 힘들어했다.

포목점 집 남자는 초대를 거절한 다음 날 멀리서 병원을 관찰했다. 그 말대로 환자 때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환자가 들락날락하는 것이 자신의 가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환자가 들어가서 나오기도 전에 다른 환자가 문을 열었다. 남자는 말수의 말을 믿었다. 다른 의심의 정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병원 일에만 전념하고 있구나, 나도 포목점이나 그렇게 할까. 입맛을 다시며 배불뚝이는 돌아섰다. 말수를 미행하고 접선한들 어떤 큰 정보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병원을 한다는 말수라는 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오.'

한 번은 일경이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배불뚝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환자가 많으니 이런저런 소식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뭐 숨기는 기색은 없어. 너희 조선인들은 말하지 않아도 눈짓만으로도 서로 통하잖아.'

배불뚝이는 그런 가당치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듯이 손을 까불고는 그렇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고 큰소리쳤다. 의사와 자신은 상해 누구보다도 친하고 흉허물없이 지내니 낌새가 있다면 한달음에 경찰서로 달려가겠다고 약속했다.

콧수염을 만지던 일경은 못내 의심하는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배불뚝이는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자신보다 상해 구력이 일천한 말수가 자신도 만나기 어려운 두목의 소식을 알거나 접촉할 대상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인물도 아니고 그 부인 역시 천상 의사였지 무슨 일을 도모하면서 병원을 위태롭게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환자로 안경 쓴 남자가 다시 방문하지 않는지 염탐했으나 그날 이후로 그 남자는 상해를 아예 떠난 것처럼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배불뚝이의 귀에도 조선독립군 모집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을 늘 자랑하는 그에게 그 소식은 달가운 것이었고 그는 마치 자신이 소집 명령을 받은 것처럼 흥분했다.

어깨만 다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현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독립군이든 일경이든 일본군이든 장개석 군대나 모택동이 이끄는 무리 등 어떤 식으로든 제복을 입고 있을 것이다.

그는 포목이나 뒤적이면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권총을 차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죽은 부하를 위해 적들의 후방을 칠 때 그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오른쪽 어깨의 총상은 하필 방아쇠를 당기는 오른손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고 그 팔로는 총을 쏘기도 전장에서 빠르게 달릴 수도 없었다. 그는 울화통이 터지면 늘 그렇듯이 술을 마시고 분을 풀었다. 

상해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조선에서는 휴의 부대원 중 한 명이 온전한 상태로 포로로 잡혔다. 그는 운이 좋게도 여러 번 등 뒤에서 총알을 맞을 위기에 처했으나 그때마다 바람이 불었는지 총알은 비껴갔고 불과 10여 미터 뒤에서 쏜 총알도 피했다.

총알이 날아오는 순간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는 지금 상해에 있거나 아니면 노량진 어딘가에 숨어서 다음을 도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권총 알이 귓전을 스치며 지나갈 때 피우융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는 더 빨리 달리려다가 그만 헛다리를 짚고 나동그라졌다. 그가 넘어지자 서너 명의 일경이 달려들어 그를 덮쳤다.

자결하기 위해 권총을 꺼낼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안 병사는 되레 잘 되었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수류탄으로 폭사 작전을 펴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막 피묻은 손을 허리춤에서 가슴 쪽으로 이동시킬 때 무언가가 그 손을 딱하고 세게 치는 바람에 손은 동작을 멈추고 뚝 소리가 나면서 부러졌다.

그는 분하다는 듯이 맷돼지처럼 식식거렸으나 체포된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동휴는 바로 그 대원을 취조하고 있었다. 말이 취조지 취조랄 것도 없었다. 동휴가 너무나도 살갑게 대해줬고 무엇보다도 고향 서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에 병사는 그만 무너져 내렸다.

죽마을에서 서천은 멀리 있지 않았다. 교통수단이 나빠 어떤 사람은 평생 서천을 가보지 않고 죽는 경우가 있었으나 동휴는 서천에 고모가 살고 있어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서너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은 포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이 됐다. 낯선 땅에서 일제의 고위 경찰인 고향 선배를 만났고 따뜻한 말로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대해주니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서천에 논 10마지기를 사 주마. 가서 늙으신 부모 모시고 잘 살아라. 여동생은 시집 보내고.'

병사는 동휴가 그 말을 하지 않았어도 다 불려고 작정했었는데 이 말까지 듣고 나자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것들까지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포로가 그려주는 휴의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생생해 몽타주는 실제 휴의와 다를바 없었다. 

몽타주를 앞에 두고 종로경찰서장 동휴와 조선헌병대사령관 와타나베 신조가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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