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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파리의 우울(1869)-어느 고독한 산책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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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파리의 우울(1869)-어느 고독한 산책자의 고백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0.04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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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보들레르에 따르면 모성애는 이렇다.

“확실하고 평범하고 어느 것이나 거의 같아서 착각의 여지가 없는 성질이다. 모성애 없는 어머니를 상상하기란 뜨겁지 않은 빛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술과 마약과 여자에 늘 취해있던(그는 실제로 ‘취해라’는 짧은 시에서 무엇이든 간에 늘 취해 있어야 한다면서 지금은 취할 시간이라고 못 박고 있다.) 보들레르가 위대한 모성애를 새삼 강조한 이유가 궁금하다.

궁금증은 풀어야 한다. 자, 여기 한 어머니의 모성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교수형 밧줄’이라는 짧은 산문시에 그 해답이 있다.

화자인 화가는 늘 관찰한다. 거리를 쏘다니다 보면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과 용모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외진 마을에서 한 아이를 살핀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에 비해 훨씬 열정적이고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대번에 반했다. 그래서 가난한 부모에게 잘 입히고 용돈도 좀 주고 붓을 빠는 일 같은 작은 심부름 말고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는 어린 방랑자로, 천사로,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으로 화가의 모델이 됐다. 가난한 오두막에서 보낸 시절에 비하면 화가의 화실은 천국이었을 터.

그런데 이 어리고 귀여운 아이는 ‘조숙한 슬픔’이라는 이상한 발작을 일으켰고 설탕과 술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화가는 몇 차례 조용하게 타일렀다.

그러나 잘되지 않자 그러면 너를 부모에게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했다. 그런 후 화가는 볼 일이 겹쳐 집을 여러 날 비우고 돌아왔다. 화가가 돌아와 처음 본 것은 밧줄에 매달린 내 인생의 장난꾸러기 소년의 시체였다.

그는 용기를 쥐어짜서는 힘들게 부모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놈은 어차피 불행하게 끝날 운명이니 이렇게 끝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체념했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불행에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 아이의 시체를 보고 싶다고 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서 화가는 그런 일을 잊기 위해 평소보다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다음 날 화가는 편지를 한 꾸러미나 받았다. 모두 이웃에게서 온 것이었는데 한결같이 교수형 밧줄을 한 토막이라도 얻기 위해서였다. 목매달아 죽은 자의 밧줄은 두통과 열병을 낫게 하는 것은 물론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마력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밧줄을 아들의 유품이 아닌 행운의 부적으로 못과 함께 가져갔다. 자, 다시 서두의 모성애로 돌아가 보자. 이런 행동은 과연 설명한 모성애와 합당한 것인가.

그것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다만 교수형 밧줄의 부제가 –에두아르 마네에게-라고 붙은 것을 보면 마네와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의 작품 ‘피리 부는 소년’이나 ‘버찌를 들고 있는 소년’을 보면 그 소년이 이 소년이 아닐까 하는 섬뜩한 연상이 생겨나 이전의 귀염둥이 인상은 모조리 뭉개졌다.

참고로 그 시절 교수형 밧줄은 모성애도 이겨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을 번역한 박철화 님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언급하면서 그 가운데 “그러고서 놈은 사형수가 대롱대롱 매달리자 밑에서 기다리던 두 사나이가 발꿈치를 잡아당겨 확실히 숨을 끊은 다음 줄을 잘게 잘라 한 사람에게 2~3 실링씩 받고 팔았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각주에 붙였다.

가난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다. 파리의 기쁨 대신 우울에 관심이 많았던 보들레르가 보기에 이런 주제는 그와 딱 어울렸다. 그는 이러이러한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잡아 짧은 산문시를 지었는데 여기서 그 내용을 다 소개할 수는 없다.

제목을 다 나열하는 것도 벅차다. 그래서 우울 중에서도 선두급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제일 먼저 언급했다. 우울과 함께 가는 것은 고독이다. 보들레르는 ‘고독’에서 신문 발행인의 말을 인용한다.

‘고독은 인간에게 해롭다.’

보들레르는 악마가 따분한 곳을 즐겨 방문하거나 고독 속에서 살육과 간음에 대한 정령이 뜨겁게 불타는 사실을 수긍하면서도 고독은 자신의 영혼을 욕정과 망상으로 채우는 방탕한 사람에게만 위험한 것이지 고독 자체가 인간에게 해로운 것은 아니라고 설파한다. 과연 시인다운 놀라운 심리 분석이다.

보들레르는 수다쟁이의 장광설이 다른 사람들의 침묵과 사색이 가져다주는 쾌락과 똑같은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독을 비난하는 자들, 떠드는 자들을 개탄 대신 경멸하고 있다.

그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해 '고독'에 관한 산문시를 마무리한다. “우리 불행은 대부분 우리가 자기 방에 머물지 못하는 데서 온다.”

보들레르는 여성을 찬양하는 만큼이나 비난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가난뱅이의 눈’에서는 아름다운 백치 여인을 저주하고 있다. 새로운 카페에서 화자인 나는 이 예쁜 여인과 앉아 있다.

▲ 보들레르는 술과 마약과 여자에 취해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 간에 취해야 한다며 지금은 취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 보들레르는 술과 마약과 여자에 취해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 간에 취해야 한다며 지금은 취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생각도 일치하고 영혼도 일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미워했는데 그 이유를 그녀는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가 그 이유를 이해하기란 내가 그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 단언한다.

가난한 아버지의 세 식구 여섯 눈동자는 감히 카페에 들어올 수 없다. 문밖에서 하나같이 아름답다고 찬양만 할 뿐이다. 나는 그들과는 다른 것이 부끄럽다.

나는 사랑하는 그대 눈에서도 내 생각을 읽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대는 부끄러움 대신 저 인간들이 견딜 수 없다며 카페 주인에게 쫓아내라고 말했다.

그런 여자를 보들레르는 사랑할 수 있을까, 영혼을 나눌 수 있을까. 여린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노파의 절망’에서는 늙은 여자에 대한 동정이, ‘서툰 유리장수’에서는 섣부른 박애주의에 대한 반항이, ‘늙은 광대’에서는 광대의 모든 것이 ‘장렬한 죽음’에서는 옛친구이며 유능한 어릿광대인 팡시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과 왕의 복잡한 심리를, ‘가짜 돈’이나 ‘타르소스’ 등은 보들레르 특유의 반전과 모순의 묘미가 가득하다.

‘정중한 사격수’나 가난뱅이 때려죽이자‘ 등은 그의 생전에 게재가 거부됐다. 어느 페이지나 꺼내 읽어도 읽을수록 시적 움직임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별천지 가득한 ‘여행으로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야 하는 이유다. 과연 <악의 씨>를 쓴 보드레르다.

: 보들레르는 아르센 우세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서두에서 <파리의 우울>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받을까 걱정한 나머지 부연 설명을 했다.

그는 짤막한 작품 한 편을 보낸다고 운을 뗀 후 이 작품을 두고 머리도 꼬리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당치 않다고 잘라 말하면서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또는 번갈아 가며 꼬리이자 머리라고 강조했다.( 뒤의 제목들과 내용은 앞선 것과 전혀 어울리지도 연관성도 없어 보이나 묘하게 엮여 있다.)

이 같은 구성은 독자에게 기막힌 편의를 제공한다며 각자 원하는 부분에서 상념이나 책 읽기를 멈출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독자들을 복잡한 줄거리를 가진 끝없는 실에 엮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 옮긴이는 각주를 달고 “계속해서 장대한 시소설을 생산해 내는 빅토르 위고 같은 문학자에 대한 보들레르의 씁쓸한 야유를 읽을 수 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작품이 “음악적이면서 리듬도 압운도 없고 영혼의 서정적 움직임과 환상의 기복과 의식의 비약에 적용할 만큼 충분히 유연하면서도 충분히 복잡한” 것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이 유고시집은( 애초 100편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그가 죽었을 때 완성작은 50편뿐이었다.) 시인의 말대로 대도시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복잡다단한 무수한 관계에 부딪히면서부터 생겨났다.

그는 파리에서도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시의 제목도 ‘이방인’이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제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제가 없다고 답한다.

친구에 대한 물음에는 당신이 입에 담은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오늘날까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고 조국은 어느 위도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불멸의 미인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고, 돈은 당신이 신을 싫어하듯이 싫어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따진다면 내가 사랑하는 흘러가는 저 멋진 구름이라고 답한다. 수수께끼 같은 남자, 고독한 산책자, 파리의 배회자 이면서 영원한 이방인이 바로 보들레르다.

길지 않으나 어떤 장편보다도 동물적, 영적 울림이 큰 산문을 읽고 나면 파리의 우울이 그려지기보다는 바그너의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보들레르는 생전에 바그너와 통했다고 하니 잘 어울릴 듯싶다. ( 이 연재물 11번째로 소개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아마도 <파리의 우울>을 모티브로 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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