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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말수가 과음을 피하지만 술을 즐긴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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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말수가 과음을 피하지만 술을 즐긴다는 것을 알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9.2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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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지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추수를 끝낸 논은 얼어붙었다. 비쭉이 솟아 나온 볏단을 피해 아이들은 저마다 신나가 달려 나갔다.

말수는 웃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 애들도 통영애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다 그런 것이다.

말수는 그 시절로 잠시 들어갔으나 이내 돌아왔다. 처음 가던 길과는 다른 길로 접어 든 것은 아닌지 말수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새로운 길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얼어 붙은 논 때문에 지형을 착각한 것을 느끼고는 그 길이 이 길인 것을 알았다. 익숙한 길을 갈 때 겪는 안도감이 따스한 햇볕처럼 몰려왔다.

굳이 그 남자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만나지 않아도 되고 만난다고 해도 오늘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말수는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여행객의 들뜬 기분은 아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온 것도 아니었고 먼 길을 떠나는 방랑자의 신세도 아니었다.

안면은 있으나 내왕은 거의 없는 먼 친척의 조문길 같은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놀라면서 알지 못했다고 후일에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할 경우가 생기면 이런 식으로 둘러대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는 대신 무슨 알지 못하는 힘에 끌려가는 것처럼 목적지를 향해 발을 부지런히 옮겼다. 논이 끝나는 지점에 집들이 시작됐고 집 사이를 10분 이상 걸어가면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는 시장이 나타났다.

포목점 집은 그 시장의 가운데쯤에 있었다. 이쯤인가, 말수는 어림짐작으로 작은 간판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들어오는 골목길을 잘못 잡았는지 말수는 처음과는 다른 방향에서 집주인 아낙이 나와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멀리서 보니 작은 여인이었으나 몸집이 제법 있어 다부져 보이기까지 했다. 파리채 대신 그녀는 털이개 비슷한 것으로 진열된 포목들의 먼지를 털어냈다. 아직 그녀는 말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손에 든 것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입구에서 사 온 만두와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싶어 배 한 봉지를 샀다. 든 손이 제법 묵직했다. 먼 거리였다면 손을 바꾸거나 한 번 쉬어야 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상대가 눈치챌 수 있도록 몸을 크게 흔들면서 목소리를 제법 높였다. 자신을 부르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 부르는 소리에 아주머니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번째 불렀을 때는 그가 십여 걸음 더 앞으로 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인물이었기에 그녀는 누군가 하는 심정으로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알고는 미안한 나머지 아이고 의사 선생님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바로 그를 안내하지 않았다. 안에 일본 순사들이 있고 말수가 접대하고 있다고 했다.

말수가 순사라는 말에 놀라자 일상적으로 한 달에 한 두번 들르기 때문에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물건을 받아든 그녀는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말수는 진열된 포목들을 무심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정말 팔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장을 오가는 행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래도록 장사를 하고있는 것을 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말수는 자신이 온 것을 순사들이 알면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몸을 숨기려고 했다. 아니면 그냥 가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주인 아내가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가 의사 선생이 왔다고 순사들도 알 수 있게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얼마 후 나오더니 선생님은 저쪽으로 가서 잠깐 순사들이 돌아가면 오라고 했다. 그 말은 말수의 존재를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말수는 그것이 고마워 그녀의 지시에 따라 가리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천천히 가면서 그는 물건이 필요해 시장에 나온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가게 모서리를 돌았다. 

그러다가 언제쯤 포목점 집으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난감했다. 순사들이 바로 나오는지 아니면 삼십분 후에 나오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골목의 귀퉁이에서 그쪽을 응시하면서 안을 염탐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헤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말수는 조금 초조했다. 날을 잘못 잡았다고 궁시렁거리면서 그는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누가 등 뒤에서 가볍게 손을 뻗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배불뚝이 주인이었다. 왜 들어오지 않고 그러고 있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이었다.

'순사들은 갔어요. 의사 선생이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나는 순사들과는 자주 만나는 편이라고 남자는 조곤 조곤 말했다. 말수는 자신이 온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에 마치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말수는 순사를 피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 같아 순간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서 저쪽에 볼일이 있어 나왔다가 지난번에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잠깐 들른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둘이 다시 포목점 집으로 발길을 돌리자 저쪽에서 안주인이 마주 오면서 혹시 선생님이 다른 곳에 계실지 몰라 자신은 반대쪽으로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오는 중이라고 했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면서 안주인은 순사가 와서 피한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큰 문 대신 옆으로 난 쪽문으로 말수를 안내했다.

순사가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그쪽으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보시다시피 문이 두 개인데 순사들은 대개 이쪽으로 들어와 이쪽으로 나가요. 자신들이 오고 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기 때문이지요.'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선생님도 앞으로 들를 일이 있으면 이 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문은 잠겨 있으나 손을 뻗으면 밖에서 열릴 수 있도록 된 임시 잠금장치를 여는 법도 알려 주었다.

그는 점점 주인 남자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굳이 묻지 않았다. 말이 많은 남자는 말수가 궁금해하고 싶은 것을 먼저 말할 것이고 말수는 그러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술상이 차려졌다. 안주인은 뚝딱 하는 솜씨가 있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날씨 애기며 첫눈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을 내왔다. 말수를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순사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차림새는 누가 먹다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갈했다. 안사람의 솜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도수가 높은 중국술에 어지간히 이력이 나고 있을 무렵이 지났다. 그래봐야 말수는 겨우 3잔째 였고 남자는 그 배를 먹었다. 

이 술은 40도가 넘어요, 하면서 주인 남자가 너스레를 떨어도 말수는 그런가요, 하면서 싱겁게 받았다.

마침 들어온 여자를 위해 말수는 이게 무슨 나물인가요 하고 물었다. 고사리와 고구마 줄기라는 답이 나왔다.

'여기 와서 처음 먹어보네요.'

말수는 상위의 젓가락을 집었다. 잘말린 나물을 적당하게 삶아서 들기름을 살짝 친 것이 여간 감칠맛이 나지 않았다.

'대단해요, 아주머니 솜씨는 한 번 맛보면 평생 기억에 남을 거요.'

말수의 칭찬에 여자는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아니라고 손사레를 쳤으나 그 말이 싫지 않았는지 있다가 가실 때 조금 싸드리겠다고 말했다.

말수는 좋지요, 좋지요 하고 연신 말했다. 남자는 기껏 나물 하나에 저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하는 심정으로 잔을 들었다. 둘은 작은 사기 그릇을 들어 부딪혔다.

남자는 말수가 과음을 하지 않지만 술을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술은 조금 고급이예요. 입에 짝 달라붙는 것이 조선 밀주 못지 않을 거요. 하고 잡은 술병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말수의 잔에 다시 따랐다.

술 냄새가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다. 냄새로 말수는 도수가 어느 정도이고 이 술은 괜찮은지 판단했다. 먹을만 했다. 이 술이라면 서너 잔은 더 먹어야지 말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남자는 술을 따르고 나서 중국 사람들이 술은 잘 만든다고 한마디 했다. 말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너무 조금전에 너스레를 떤 것이 미안해서인지 그는 조금 점잖을 떨었다.

술이 두 어잔 더 들어가자 남자는 문 쪽을 한 번 힐끗 보고 나서는 순사들이 들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저자들의 첩보 활동은 집요해요. 한 번 안면을 트면 그것으로 계속 찾아옵니다. 무슨 끈 같은 것으로 엮어서 놔두지를 않아요. 아마도 그들은 나를 조선독립군을 잡는데 이용하려고 하나 봐요.'

말수는 뜨끔했다. 말수는 입가를 다시며 독립군과 아저씨가 연계됐어요? 하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돌려 묻다가는 괜한 시간 낭비만 올 것 같았다.

말수는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곧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요. 큰일 날 소리를. 의사 선생. 나는 그들과는 일면식도 없어요.'

그는 크게 손사레를 쳤다. 그러나 사실은 두 어번 독립군의 하부조직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아주 말단이라서 이야기 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순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순간 여간 귀찮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알아도 모른다고 한다고도 했다. 남자는 빠르게 술을 마셨다. 술기운인지 아니면 그것을 핑계삼아 인지 이번에는 자신이 순사들하고 친하다는 말을 했다.

이것도 장사라고 장사를 하려면 순사들 뒷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없으면 제대로 돈벌이가 안 된다고 푸념했다.

'그런데 말이요. 의사선생. 내가 그 독립군 하부 조직에게 돈을 준 것이 있어요. 하도 조선독립군이 돈이 없어 굶는다는 말을 듣고 아내 몰래 좀 집어 줬어요. 그런데 그 녀석이 심심찮게 찾아왔요. 제 딴에는 나를 숨은 애국자라고 보고 물주로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나이도 어리고 하는 짓도 나쁘지 않고 해서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오면 있는 것 조금씩 주어 보냅니다. 엊그제도 그 애가 다녀갔어요.'

그 말을 하면서 사내는 말수의 얼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귓속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문제가 될 것처럼 조심하는 눈치였다.

'이런 건 아내한테도 하지 않을 말입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몰라요. 자, 술이나 마십시다.'

그는 이 지경이 된 상황을 아주 나쁘게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말수는 그런 감을 잡았다.

'의사 선생, 선생은 조선독립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배우신 분이니 우리 같은 무지렁이에 비해 뭔가 깊은 생각이 있을 것 아니오.'

말수는 말을 아켰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입도 무겁지 않고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은 위험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독립군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것 처럼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돈을 줬다고 실토하고 일본 순사들과도 친분을 자랑하고 있다.

당신은 누구이며 어떤 쪽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말수는 참았다. 그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독립군가는 누구한테 배운거요.'

말수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군가도 배우나요? 그렇지요. 배우지요. 내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말했지요.'

'알고 있어요.'

'그 때 이런 저런 군가를 수도 없이 불렀어요. 그런데 유독 그 노래가 군복을 벗고 있는 지금도 입에 붙어서 떠나지 않아요. 곡이야 그렇다고 쳐도 가사가 참 그래요.'

'그렇지요. 아내가 곡 연습을 하는데 그 노래도 곧잘 쳐요. 나보고 가사를 외웠느냐고 묻기까지 했지요.'

말수는 아내를 끌어들였다.

'사모님이 음악에 소질이 있어요.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고 그 무슨 노래지요. 아, 그래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부를 때면 고향으로 막 달려가고 싶더라니까요.'

'홍성말이지요?'

'홍성은 아내고요. 저는 서천입니다. 다리 하나만 넘으면 군산이지요. 배 타고 군산을 간혹 나갔어요. 거기 가야 은행도 있고 즐길 거리가 있지요.'

남자는 조선에 있을 때 군산에 자주 들렀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말수는 자리가 길어지자 일어나야 겠다고 자리를 털었다.

의사 선생은 꼭 기분이 좋으려고 하면 자리를 파한다면서도 남자는 말수를 잡지 않았다.

'내일 수술이 있지요?'

그가 먼저 말을 했다.

'그래요, 넘어져 손을 다친 환자가 있어요. 놔두면 곪아서 어려워질 수 있거든요.

'의사 선생, 오늘도 즐거웠어요.'

'술맛이 좋은데요. 이 술 다음에도 같이 먹읍시다.'

'그러지요.'

말수는 다시 아이들이 썰매를 타던 논 앞을 지나갔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서인지 거의 다 가고 서너 명만이 남아 있었다.

조선사람을 만나 편안했나요? 

말수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아니다, 라고 답을 못하겠다. 비록 신뢰는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쟁이도 아니다. 그와 있어서 편한 시간이었다.

말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입가에는 나물 냄새가 배어 있고 고향 하늘이 어른거렸다.

나물 하나에 말수는 기분이 좋아졌다. 술기운이 몸을 따뜻하게 데워 말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여~ 저도 모르게 입가에  노래가락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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