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6 06:02 (금)
그는 자신에게 다른 운명이 닥쳐 오고 있음을 느꼈다
상태바
그는 자신에게 다른 운명이 닥쳐 오고 있음을 느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9.16 1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흘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처음 일주일은 혹시나 그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기대감도 두려움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보름이 지나자 그가 조금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달이 채 못 돼서 그 남자가 다시 들어왔다. 그는 포목점 집 주인을 통해 용희 부부 내외와 마주했다.

배를 앞으로 디밀면서 들어온 포목점 주인은 의사선생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자신이 온 것을 미리 알렸다. 그 뒤에는 부인이 한 발 떨어져 서 있었다.

말수는 목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이 왔구나 생각했다. 그는 일어서서 아주 반갑게 그를 맞았다. 응급환자가 아니었고 부인도 환자라기보다는 방문객으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포목점 주인은 안사람이 진료를 받고 싶다고 말수를 보면서 아까와는 달리 조신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료 받을 사람이 자신이 아니고 아내라고 뒤를 돌아보면서 이 사람을 진료좀 해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말수는 직감적으로 어떤 중병이나 그것이 의심스럽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그러시지요, 요즘은 부인병 환자들도 많이 와요. 하면서 환자를 안심시켰다.

이층으로 부인을 안내하고는 일층에서 말수는 남자와 진료가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환자가 없었기 때문에 말수는 그동안 그 남자가 어떤 일로 지냈는지 궁금한 것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조선말이 아닌 중국말로 사업은 그런데로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아내가 임신인지 달거리가 한 달이 지나도 없다고 자신이 온 목적을 먼저 말했다.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온 것이지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 말고도 무슨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혹시 그 남자가 왔었느냐고 물었다.

말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남자가 부연 설명하기를 기다렸다.

'아, 그 남자 말이오. 안경을 쓰고 복통인지 맹장 때문에 한 번 왔던 사람 말이오.'

'아, 그 사람요? 아니요. 오지 않았어요. 아마 급체 했던 모양이예요. 맹장은 아닌 것이 확실하니 더는 병원에 올 일이 없지요. 그런데 그 남자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말수는 일경들이 들이닥친 것은 말하지 않고 대신 남자가 답을 할 수 있도록 질문을 건냈다. 그 자신도 알고 싶었던 것인데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니 자연스럽게 뿔테 안경의 남자에 대해서 물었던 것이다.

'아니, 뭐 별 거 아니요.'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말수가 되받았다. 조금 불쾌하다는 투였다.

'아, 곽형, 나중에 내가 다 말해줄게요. 지금은 아냐, 의사양반.'

그는 이렇게 얼버무렸다. 그때 다리를 다친 환자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면서 대화는 잠시 멈추었다. 이층에서는 용희가 포목점 주인 여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편처럼 달거리가 한 달이 지나도 없다고 했다. 혹시 둘째애를 임신한 것은 아닌가 하고 궁금해서 왔다는 것이다.

용희는 그것말고는 다른 증상은 없는지 물었다.

'입덧 같은 것은 없어요. 첫째 애 낳을 때도 그런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어요. 워낙 장사가 급하기도 했고 사는 것이 팍팍하다 보니 힘들어도 그냥 넘어간 것 같아요.'

용희는 한 달 가지고는 임신 여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말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달거리가 한 달 멈췄다고 해서 바로 아기를 가졌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산부인과 지식으로도 그랬다. 그래서 둘은 화제를 바꿨다. 아랫층에서 남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곳에서 지난번에 마저 하지 못했던 수다를 떨자고 했다.

포목점 집 여자는 중국말이 아닌 조선말을 썼다. 용희도 그렇게 했다.

'조선말이 편해요.'

'맞아요. 나도 그래요.'

둘은 엷게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말이예요. 지난 번 얼 핏 들으니 무슨 조선독립운동 같은 이야기를 하던데 남편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아이, 아니에요,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그이는 그런 것 몰라요. 그런데 왜 그걸 물어보나요.'

아니 뭐, 딱히 이유는 없고요. 지난 번 방문 때 그런 애기를 해서요.'

'그렇군요. 우리 남편이 황포군관학교를 나왔잖아요. 그 기세가 있어요. 그래서 군대 이야기라거나 무슨 운동 같은 것에 관심이 있지요. 조선 사람들이 여기서 독립운동을 많이 해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소문도 돌아요.'

이 말을 하면서 포목점 집 아내는 누가 들을까 조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참, 주책없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이제 가봐야겠다고 일어섰다. 가게를 오래 비울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둘은 같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 남자들과 합세했다.

다리 환자를 치료한 말수가 손을 씻고 진료실을 나왔다. 목발 환자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절뚝 거리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포목점 남자가 앞으로 나오면서 제수씨 안녕하세요, 하고 고개를 까닥했다. 용희는 미소를 지으면서 답례했다.

'먼길을 오셨어요.'

'아니요, 제수씨 치료 솜씨가 단연 최고라서 다른 곳 다 제쳐 두고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차 한잔하시고 가세요.'

용희가 모자를 집어 드는 남자를 붙잡았다. 말수도 환자도 없는데 그러시지요. 하고 거들었다. 남자는 바쁘다고 하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피아노 옆에 세워진 기타를 보았다. 음악을 하는 구나,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곡 신청하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을까. 괜찮을까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자문을 구하려는 듯이 용희와 함께 간이 주방으로 가는 아내를 불러 세웠다.

'당신도 기타좀 배우시구려. 아니면 피아노라도.'

그의 아내는 대답없이 사라졌다. 차는 커피였다. 구수한 냄새가 진료실의 소독약을 대신해 네 사람을 감싸고 돌았다.

'피아노는 제수씨가 치고 기타는 우리 선생님이 하시나요?'

남자가 한 모금 마시고는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듯히 물었다. 말수가 손을 저었다.

'음악은 잼벵이 입니다. 다 아내 솜씨고요. 저는 듣기만 합니다.'

남자의 아내가 나섰다.

'그러지 마시고 한 곡조 해보시지요.'

말수는 그 일을 용희가 해주기를 바랐다.

눈치를 챈 포목점 집 아내가 용희를 쳐다보면서 노래를 청했다.

'듣고 싶어요.'

처음에는 노래가 아니라 연주를 원했으나 용희는 나즈막히 노래를 불렀다. 목포의 눈물이었다. 그 노래는 어떤 설움을 느끼게 했고 그리운 먼 곳을 생각나게 했다.

남자가 박수를 쳤다. 세게 치고 나서는 너무 슬프니 조금은 힘이 나는 노래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너스레를 떠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말수가 재빨리 나서서 답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남자는 머뭇 거렸다. 그러다가 난 반주 없이 부르겠다며 빠른 노래를 아주 느리게 불렀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노래를 끝내고 남자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용희도 말수도 처음 듣는 노래였다. 유행가 가사가 아니었다. 박자로 보니 군가였다. 그런 군가를 말수와 용희는 질리게 들었다.

빠른 박자에 힘찬 구호에 젊은 병사들의 피가 끓었다. 그 피는 대일본제국의 승이를 부채질했고 뒤로 밀리는 전선을 앞으로 당기는 힘이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박자는 군가 형식이었으나 가사는 전혀 딴판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노래였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던 용희는 노래를 마친 남자를 멍한이 쳐다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이는 흥만 나면 이 노래를 불러요. 누가 군인 출신이 아니랄까봐.'

포목점 주인의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못마땅한 표정은 아니었다.

'함부로 노래를 부르다가 경칠 일이 있을 거라니까. 그때는 날 원망하지 마요.'

이런 말을 덧붙였으나 이때도 부인은 그렇게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사실 남자는 흥만 나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장소를 가렸으며 때를 정확히 구분했다. 불러야 할 곳이 아니면 철저하게 피했다. 그러면 이곳 병원은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인가. 말수는 조금 언찮았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처음 만나면서부터 포목점 집 주인은 말수 내외를 눈여겨봤다. 이들의 얼굴 표정과 태도에서 보통내기들이 아니고 쉽게 입을 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방관자인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닌 어떤 묘한 감정 같은 것이 있었다.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먼 이국에서 동지로 함께 할 사람들이라고 포목점 주인은 판단한 것일까. 그런 가 보다. 이런 판단 근거는 또 있었다.

순사들이 병원을 급습한 내막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부가 그 뿔테 남자에 대해 어떤 내용도 털어 놓지 않은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심어 놓은 연락책들은 일경이 병원에 들이닥친 것과 그들이 심문한 결과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런 내용을 듣고 포목점 집 남자는 의사 부부를 신뢰했으며 심지어 존경하는 마음까지 같게 됐다.

 그런 까닭에 이런 노래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너무 앞서간 것인가. 남자가 후회할 즈음 용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태연하게 가락이 군가군요. 혹시 악보와 가사를 알 수 있을까요.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는 듯이 남자는 악보 같은 것은 모른다면서 탁자 옆에 있는 볼펜을 들어 자사를 쓱쓱 써내려 갔다. 용희가 웃으면서 종이를 받았다.

'악보가 없어도 음악 천재이시니 칠 수 있겠지요. 내가 한 번 더 노래를 불러 드리리다.'

포목점 집 남자가 다시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여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그의 아내도 따라했다. 말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싶었으나 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다른 운명이 닥쳐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기분 좋은 봄바람 같은 것이었고 성난 파도와 같은 것이었다.

용희는 노래에 따라 건반을 두드리다 멈췄다를 반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는 눈치였다. 용희는 이 순간 말수와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이상하게 흥이 나는 노래였다. 똑같은 옷을 입고 수십 명이 허리에 손을 대고 혹은 박자를 맞춰 달려 가면서 부르던 노래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연병장에서 혹은 군함의 갑판 위에서 부르던 노래는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배불뚝이의 노래는 고향의 봄처럼 따스했다.

독창이어서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췄기 때문인가. 아니면 조선말로 불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말수처럼 용희는 노래 한 곡으로 다가올 운명을 예감하지 않았다.

다만 칠 곡이 하나 더 늘어 부지런히 연습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피아노도 기타도 잘 어울린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