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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3-02-04 19:40 (토)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말수는 흥얼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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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말수는 흥얼 거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8.29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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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희는 심호흡을 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살고 나니 생각지도 못했던 장벽이 앞에 버티고 섰다.

그녀는 눈을 감은 그 상태로 걸음을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이쯤이다 싶은 장소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정확히 그곳은 아니었다. 피아노는 몇 발치 더 앞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은 그녀는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건반 위에 올린 손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따라가는 입을 좇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든지 배우는데 용희는 빨랐다.

한 달 남 짓 배웠을 뿐인데 곡을 보고 칠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다. 피아노 선생은 우리 의사 선생은 음악을 했어도 성공했을거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용희는 그 말을 떠올리면서 약간 웃음기 있는 얼굴로 곡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너는 무엇을 찿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목소리는 낮고 처량했으나 눈물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이 노래는 혼자 있을 때만 불렀다. 며칠 전 말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한 번 시험해 보자고 피아노 앞으로 용희를 끌었을 때 불렀던 노래였다.

5분이나 되는 긴 노래를 다 듣고 나서 말수는 박수를 쳤지만 슬픈 노래이니 다른 노래를 앙콜로 청하겠다면서 눈을 꿈벅였었다.

슬픈 노래. 그렇다, 이 노래는 슬프다. 용희는 윤심덕을 알았다. 틈만 나면 신문을 읽고 책을 펼친 결과였다. 노래 취임 후 바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죽은 어린 여성 윤심덕을 용희는 잊지 못했다.

이런 음색으로 이런 노래를 부르는 저 여자의 무엇이 삶 대신 죽음을 불러 왔을까, 그녀의 넋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수는 그런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순히 슬픈 노래로 단정지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수 앞에서는 그 노래를 연주하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노래가 그치고 반주가 이어질 때 용희는 순간 뒤에 어떤 차가운 기운을 느껴 몸을 돌렸다.

인기척은 없었다. 일어서서 계단 쪽을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혹시 말수였을까. 내 노래 소리에 끌려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왔을까. 말수는 들었을까.

용희는 그런 마음을 가졌으나 이내 그만두고는 다시 건반 앞에 앉았다. 그 노래를 가급적 부르지 말자. 부르고 나면 자신도 슬퍼지는 것을 용희는 알고 있었다.

기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은 슬픈데 몸은 한결 가라앉았다. 차분해지고 무언가에 쫓겨 급히 서둘러 하기보다는 한 발 뒤로 미뤄놓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지금도 그랬다. 그녀는 내친김에 노래 한 곡을 더 연주하기로 했다. 이난영이었다. 용희는 상해에 도착하고 나서야 ‘목포의 눈물’을 처음 들었다.

그녀는 기교가 뛰어났다. 목소리도 청아했다. 타고난 노래꾼이었다. 일본에 가면 크게 성공하겠다. 용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건반을 두드리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가사는 ‘사의 찬미’처럼 서러움을 몰고 왔다가 진정제처럼 마음을 가라앉혔다. 노래를 연속 두 곡 부르고 나자 용희는 다시 마음을 추스렸다.

가슴을 죄던 답답함은 사라지고 다시 여유가 찾아오자 그녀는 부드러운 목조 계단의 감촉을 느끼며 아래로 내려갔다. 말수는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 역시 용희처럼 익히고 배우는데 열중했다.

‘여보 무슨 소식 있어요.’

‘늘 그렇지. 싸우고 다투고 죽고 하는 전쟁 이야기가 많아.’

‘미국은 어때요.’

‘기세가 올랐어. 도쿄 공습도 성공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이긴 모양이야.'

‘도쿄 공습은 훨씬 전 일이잖아요.’

‘그렇지만 그것이 효과가 컸던 모양이야.’

‘우리 일본이 밀리나요.’

‘우리? 그래 우리가 밀려.’

‘신문에도 그렇게 났어요?’

‘아니, 그 반대야. 하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돼.’

‘우린 어쩌지요.’

‘뭘 어째, 하던 일 하면 되지.’

‘그래요, 그렇군요. 그런데 여보, 나 기타도 배우고 싶어요.’

‘기타, 웬 기타.’

‘그냥요, 피아노를 치니 기타가 눈에 들어와요. 당신도 같이 배워요.’

‘피아노 선생이 싼 기타가 있대요. 거저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마음이 있으면 말하래요. 공짜로 가르쳐 준다고요.’

말수는 뒷머리를 긁었다.

기타살 돈이야 물론 있다. 간혹 외상도 있지만 병원 치료비는 현금이 대세였다. 월세를 내고도 돈은 조금씩 모였다. 환자는 늘고 있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왜, 싫은가요.’

용희가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바라면서 말수 옆으로 다가갔다.

‘여보, 당신이 원하면 그렇게 해요.’

용희는 말수의 품에 기댔다.

‘당신이 없었으면 난 벌써 죽은 몸이예요.’

‘원, 당신도. 뜬금 없기는...나도 당신 없었으면 죽은 몸이야.’

‘우린 행복한 거죠.’

‘그래 위아 해피야.’

‘앞으로도 그럴 거죠.’

‘물론 그렇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이 말수가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대답했다.

‘다음 달이 크리스마스잖아. 선물로 사줄게.’

‘좋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당신은 나에게 뭘 해 줄거야.’

‘뭘 바래요?’

‘아무것도.’

‘말해봐요.’

‘당신이면 충분해.’

‘그러지, 말고 말해봐요. 어서요.’

‘우리 아이 하나 키울까.’

용희는 말수의 품을 빠져나왔다. 올 것이 오고 말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밀려왔다.

‘아기요. 우리 아기요?’

용희가 되물었다.

‘그래, 우리 아기. 우리가 평생 병원을 할 수 없잖아. 애들한테 물려주고 우리끼리 놀자. 응.’

‘나쁠 게 없지요. 그런데...’

‘그런데 뭐?’

말수가 미소를 지으며 용희의 어깨를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아임 굿 데디.’

말수가 영어를 쓰면서 히죽거렸다. 용희가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요. 난 좋은 엄마가 될 거에요. 그렇게 해요.’

말수는 용희를 들어 올리고 빙빙 돌았다.

그의 입에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그 노래, 싫다고 했잖아요.’

용희가 팔에서 풀려나 놀라는 듯이 물었다.

‘뭐, 노래일 뿐이잖아. 그리고 맞잖아. 내 가는 길 어디인지 나도 그것이 궁금해.’

말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용희도 웃었으나 말수의 마음과는 같지 않았다.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말수의 흥얼거림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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