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3-28 20:29 (목)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상태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8.03 14: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는 걸었다. 하염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데 따른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일은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순간 잊어버렸다. 

그가 걷는 것은 화난 몸을 달래기 위한 오로지 자신 때문이었다. 제대로 되지 않은 일에 대한 불만을 삭히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몸속의 불 같은 것이 자꾸 머리 쪽으로 올라와서 곧 터질 것만 같았다. 동휴는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인지 넘어지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술 취한 사람이 쓰러지기 직전에 보이는 휘청거림이 자신에게 찾아왔다. 그래도 그는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더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의로운 길에 사사로운 정이 가로 막을 수 없다. 그는 그런 생각으로 몸을 겨우 지탱했다. 혹시 모를 죄책감 같은 것을 떨쳐 내기 위해서 정의를 내세웠다.

그러면서 사로 잡혀야 할 것은 그런 정에 이끌리는 자신의 마음이라고 자책했다.동휴의 발걸음은 어느 새 종로 삼가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여기도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손에 들고 등에 지고 마차에 싣고. 손에 든 것이 등에 진 것이 마차에 실은 것이 무엇인지 다 파헤쳐 보고 싶었다. 

무지렁이 같은 저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살아가는지 과연 그들의 삶이라는 것도 살 가치가 있는 것인지 동휴는 잠시 쉬면서 생각했다. 파고다 공원의 경계석은 따뜻했다. 

누군가 방금까지 앉아 있다 떠난 모양이다. 그는 그 자리에 자신이 앉는 것도 불쾌했다. 그들과 동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어날 까 했으나 몸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

대신 눈에 들어온 희미한 풍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기와 지붕의 출입구와 그 안에 있는 작은 공원, 그리고 제법 높게 서 있는 탑과 나무등이 고개를 뒤로 돌리자 한 눈에 들어왔다. 

저런 것들은 다 무엇인가. 쓸모없는 것을 떨쳐 내기 위해 동휴는 일어섰다. 불현듯 창경원으로 가고자 하는 욕구가 일었다. 호랑이나 원숭이가 반겨줄 것이다.

흰옷 입은 자들보다 동물들이 차라리 더 소중했다. 조선땅에는 조선인 대신 그런 짐승들이 우글거린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본토인들이 들어와서 쉬고 가는 그런 장소로 조선은 제격이었다. 

굳이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개미떼처럼 모여 살 필요가 있을까. 동휴는 조선인은 물론 조선과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싫었다. 사라져야 할 것이 그러지 않고 버티는 꼴이라니 그는 혀를 찼다.

증오심은 더 커졌다. 기회가 되면 저런 낡아 빠진 초가집이니 쓸모가 떨어지는 한옥 같은 것을 죄다 헐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순사 회의 때 이런 것을 건의 좀 해야겠다. 그런 쪽으로 동휴는 계속 생각의 끈을 이어갔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아도 생각은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도로도 넓히고 집도 다 헐고 사람도 다 이주시키거나 어떻게 하고 그 자리에 서양식 건물을 짓고 아니 일본식으로 짓고 동물을 풀어 놓고 그러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지겠지. 

왕이라는 자가 백성을 억압하고 호의호식 하던 궁궐에 동물원을 만든 것은 일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얼마나 잘한 결정인가.

언제나 동휴는 일본이 하는 일이라면, 한 일이라면 옳다고 여겼다. 최상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뿌리 깊은 친일사상은 그의 모든 밑바탕이었다. 독립운동하는 자들이 사라지고 동물이 차지한 그 꼴을 보면 참으로 고소할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생각이라는 것이 있는가. 우리를 도와주고 근대화 시켜주는 일본에게 고맙다고 매일 삼천 배를 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독립이니 주권이니 하고 외치고 다닌단 말인가.

독립만 외치지 않으면 다 주고 싶었다. 그래도 같은 조선인인데 주권 어쩌고 저쩌고 나불대지만 않으면 그들과도 같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그런 짓에 목숨을 걸고 있다.

재산을 던지고 가족까지 팽개치고 있다. 개돼지 만도 못한 것들이다. 동휴는 탁 하고 침을 뱉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분을 참지 못한 그는 급기야 지나는 행인에게 발길질을 했다. 처음에는 화를 내고 대들려던 사람은 동휴가 허리에 찬 권총을 슬쩍 보여 주자 서너명이 한꺼번에 줄행랑을 놓았다. 

어떤 자는 아예 땅에 엎드리고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두 손을 빌었다. 큰 죄를 짓지 않은 그들을 동휴는 용서했다. 이런 무지렁이 때문에 본국이 신경을 쓴다는 것이 도무지 알 수 없어 동휴는 머리를 저었다. 모두가 이런 자들이면 얼마나 좋을까. 

창경원 동물을 구경하고 느릿하게 인사동으로 동휴는 접어들었다. 딱히 그곳에 가려는 목적은 없었다. 그냥 심심해서 혹은 오랜만이라서 발길이 그리로 이끌었다.

좁은 골목길을 나서면서 그는 눈에 제일 먼저 띄는 곳에서 밥을 먹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서울역에서부터 오후 내내 걷느나 그는 지쳤고 그래서 약속한 대로  눈에 먼저 걸려든 선술집에 들어가 늦은 점심과 술 한잔을 마셨다.

그가 몇 술 뜨고 나서 한숨을 돌리는데 어디선가 미술대회니 유화니 골동품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조선말과 일본말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들이 분명했다.

이 시각에 이런 곳에서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은 조선인들 가운데서도 드물었다. 문득 그는 그들이 궁금했다. 그와 동시에 가라앉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조센징 주제에 무슨 화가니 그림 타령인가. 같잖은 그들을 동휴는 쏘아보기 위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서양식 옷을 잘 차려 입은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한 쪽 구석에서 웃고 떠들면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잘 들리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하는 대화 톤이었다.

저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돌린 동휴는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술잔을 탁하게 놓고 기세 좋게 주모를 불러 한 병더를 외쳤다. 

취하고 싶었다기보다는 호기를 부려본 것이다. 조선 팔도에서 총을 가진 경부에게 대들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복을 입었어도 그는 자신이 경찰 간부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되레 드러내야 했다. 그는 거칠 게 없는 잔잔한 바다 위의 함정처럼 행동했다. 누가 있거나 말거나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뒤돌아 본 그 순간 어디선가 본 모습의 여자라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 내려고 머리를 짜냈다. 

그의 거친 행동은 그 순간 멈췄고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숨을 죽였다. 확실히 전에 본 얼굴이 틀림없었다. 옷이 바뀌고 머리 스타일이 다르고 말하는 투가 변했다고 해도 본 바탕은 남아 있었다.

누구지? 누구냐고? 쉽게 떠오르지 않는 이름 때문에 동휴는 또다시 화가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속으로 곱씹으면서 기어이 그 여자가 누구이며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한 번 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뻔한 수작같기도 하고 상대가 무안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에게도 염치라는 것이 있고 그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자신은 숨기고 남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순사가 취할 행동이었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아도 너는 나를 알아 봐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술을 가져온 주모가 다시 원래 왔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손을 잡아 옆에 앉혔다. 

그리고 쓸데 없는 소리라거나 하나마나한 말을 하면서 뒷자리의 손님이 자신에게 시선이 옮겨지기를 기다렸다. 당연히 그녀도 자신쪽을 볼 것이고 그러면 동휴는 안 보는 척 하다가 기억나지 않는 얼굴과 마주칠 것이다. 두 번이라면 한 번으로는 알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을지 몰랐다.

'주모, 여기에 여기 이 술잔에 여기 빈 잔에 있는 술을 가득 부어라.'

그가 호기롭게 말했다. 마치 양반이 종에게 하듯이 거드름을 잔뜩 피우면서 동휴는 그 말을 하는 자신이 예사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뒷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떠들었다.

연극을 하는 듯한 지나친 꾸밈에 주모는 약간 망설이다가 일본 경찰이라는 위세에 밀려 속으로는 개새끼라고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굽신 거리면서 공손하게 두 손으로 잔을 따라 올렸다.

'그래 너 몇 살이냐?'

다짜고짜 동휴는 주모의 나이를 물었다.

부모뻘 되는 주모가 당황했다. 처음 들어보는 너라는 말은 그렇다 쳐도 나이를 물어보는 것에 대답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너, 몇 살이냐고?'

주모는 머뭇거렸다. 말하기 싫어서 혹은 아니 꼬아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 주모는 잘 알지 못했다. 남편이나 자식의 나이는 알아도 본인의 나이가 몇 살인지 몰라서 주모는 대답을 주저했다.

'빠가야로, 조센징. 조선 것들은 늙으나 젊으나 양반이나 상놈이나 다 똑같아.'

그는 떠벌였다. 취기가 오르기도 했고 괜히 심술도 부리고 싶었고 뒷 좌석의 사람의 관심도 끌고 싶었다. 술잔을 옆으로 밀쳐 놓고 그는 느닷없이 주모의 뺨을 후려 갈겼다. 중심을 잃은 주모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탁자에 있던 술병을 깨트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