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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산들이 일부러 배치해 놓은 것처럼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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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산들이 일부러 배치해 놓은 것처럼 잘 어울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7.15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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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는 그런 부하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대 놓고 말하지 않아도 눈빛과 명령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시켜 주기만 하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의가 두 눈 가득히 들어왔고 기꺼이 군소리 하나 없이 지시를 따르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다.

분명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명령하는 자나 그것을 실행하는 자나 다 같이 기쁘기는 어려운데 지금은 둘이 하나가 될 것처럼 잘 어울렸다. 지휘관과 병사가 이런 마음이니 이럴 때 적들은 강하다 해도 약하기 마련이다.

과연 그런 마음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휴의는 자신의 뒤를 돌아봤다. 정말로 일어나서 뒤를 보았다. 산하는 가을의 붉은 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것이 누가 일부러 배치해 놓은 것처럼 산들은 서로 잘 어울렸다. 이 산하가 나를 부르는 구나. 휴의는 저도 모르게 감상에 빠져 들었다.

그런 감상은 나쁠 것이 없었다.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는 전선일수록 마음을 다독이는 그 무엇이 필요한데 휴의에게는 그것이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일이었다. 수천년 내나라 였다가 남의 나라가 된 것이 마음의 동요를 더 일으켰다.

그러나 감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직 하지 못해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그것은 해가 가고 달이 가고 한 해가 지나도 말끔히 씻을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 하나 처리해 나가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부하들이 보이는 복종심을 최대치로 끌러 올리는 일이다. 여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명령을 따르는 자들은 그 명령때문에 자신이 위기에 빠지면 태도를 금세 바꿀 수 있다.

그런 점을 휴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잠시 기쁜 마음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차분한 마음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이것 역시 나쁠 게 없다. 지휘관은 감정의 기복이 있더라도 마침내 평상심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압감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심을 계속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평상시라면 군기를 잡는다고 빳다를 치면서 호기를 부릴 수 있고 계급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

그러나 전시에서는 그런 방법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게릴라 전에서 자발적인 복종심 없는 일방적 명령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다. 어쩌다 작전에 성공했다고 해도 다음 작전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적은 수로 강한 적을 상대할 때는 서로 의지하고 믿는 마음이 우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휴의는 자신이 부하들에게 해준 것에 비해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철두철미한 의식으로 무장된 독립군이라고 해도 때로는 작은 바람에 흔들릴 때가 있는 법이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상해를 출발해 한달 간 달려 왔음에도 그들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고 지금까지 꿋꿋하게 전진해 오고 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오는가. 휴의는 자신도 때로는 이곳을 도망쳐 편히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 때가 있었다. 점례와 아무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토박이들에게 잘 봐달라고 반갑게 인사하면서 인생을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저들에게도 없지 않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아주 많이 시도 때도 들것인데 그들은 어떤 연유로 험악한 이 길을 선택했는지 자는 병사들을 하나씩 깨워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실제로 그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그러고 싶어 실제로 깨우려고 옆에 있는 병사의 어깨를 흔들려고 손을 뻗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그만두었다. 대답은 예상했던 것과 비슷할 것이고 아니라 한들 그러니 너는 여기서 그만두고 하산하라고 등 떠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론 생각에 휴의는 헛웃을 짓기도 했다.

갖은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점례가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보란듯이 총독을 해치우고 병사들을 안전한 장소에 모은 다음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인사동을 배회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느끼는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그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다부지고 아름다운가.

거슬러 올라가면 1921년 의열단 소속의 김익상 열사는 실제로 총독부에 잠입해 수류탄을 던졌다. 어이없게도 첫발은 불발이었다. 제일 중요한 첫발이 터지지 않은 것은 의열단뿐만 아니라 조선민 전체에도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가장 아쉬움을 삼낀 것은 김의사 자신이었다. 기어이 성공하리라고 수 없이 연습했건만 실제에서는 그러지 않자 그는 절망했다. 그러나 열사는 굴하지 않고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는데 성공했다.

총독부 이층은 엄청난 굉음으로 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마침 그곳을 지나지 않았던 침략자의 수괴는 폭탄의 불벼락을 운좋게 맞지 않았다.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총독 암살이 실패라고 해서 모든 것이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시도를 했고 실제로 던졌으며 던진 것이 장난감이 아닌 살상용 무기였다는 사실에 일제는 서늘한 간담을 진정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총독 초소를 무사히 돌파하고 관저까지 진입한다면 휴의는 자신의 손으로 총독을 격파하고 싶었다. 총독은 두번째는 운 좋은 사내로 남지 않을 것이다.

휴의는 적의 심장을 향해 던져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 발의 수류탄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 감촉을 느끼면서 손으로 하나 하나 만져 보았다.

세 발을 다 아기 손가락 만지듯이 만져본 다음에는 권총도 같은 방식으로 옷 위로 감촉을 느꼈다. 총구에서 부터 총열과 몸통 그리고 권총 손잡이까지 일일히 그러고 나고 나서 휴의는 성공의 열쇠는 이것이다, 라고 자신에게가 아닌 무기에게 다짐을 주었다.

'기다려라. 그때까지 더 나쁜 짓 하지 말고 지금까지 해온 나쁜 짓을 반성하고 있어라. 그래야 조금이나마 죄를 벗고 지옥행을 면할 수 있다.

얌전히 총알을 받기 위해 갑옷은 입지 말고 얇은 잠옷 차림으로 있어라. 옆에는 너의 사랑하는 부인이나 가족 대신 네가 신뢰하는 일급 참모가 있어야 한다.

네 죄가 크지 네 식솔의 죄는 이 순간 용서해 주겠다. 대신 너를 충동질하고 너에게 나쁜 마음을 심어주는 심복은 반드시 너와 함께 구천으로 가는 길동무 삼아야 한다.

저승길도 혼자면 외롭고 쓸쓸할 것이다. 그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같이 가면서 과오를 더듬어라.'

휴의는 이 같은 계획에 빠지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뒤에는 다짐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작전은 세부적인 것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일의 성공과 실패에 따른 후퇴방법도 정해졌다.

물론 정해진 것이 메뉴얼 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피가 튀는 현장은 수시로 상황이 바뀌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갑자기 숨어 있던 사냥개처럼 튀어나올 수 있다. 그런 것은 현장에서 판단해야 한다.

병사의 손가락 마디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작전을 성공하고 나면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상해로 도피해야 한다. 아직 조선 땅에 남아 장기전을 치를 여력은 되지 못한다.

거기서 임정의 새로운 지시를 받고 새로운 계획하에 새롭게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휴의는 상해로 가는 대신 발길을 돌려 인사동에 머물 것이다. 성공이든 실패든 살아남은 병력의 이동은 자신이 아닌 부관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그는 떠나 올 때 임정 수상에게 조선에 남아 총독부 피습 이후 일제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다음 작전에 쓸 보고서를 만들기로 사전에 약속을 받았다.

그와 함께할 사람은 삼대째 내려오는 종로 토박이 30대 남자로 이름은 마영수였다. 그는 휴의보다는 계급상 밑이었으나 나이로는 위여서 사석에서는 휴의가 형님이라고 불렀다.

형님과 둘이서 휴의는 총독부를 염탐하면서 조선 내에서 새로운 투쟁 동력을 끌어모아야 한다. 그가 이런 논리로 수상의 허락을 받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미안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점례가 없었다면 과연 이런 생각이나 이런 작전을 세울 수 있었을까, 휴의는 고개를 저었다. 총독 관저 공격도 점례가 없었다면 점례를 만나려는 휴의의 간절한 마음이 없었다는 가능한 시도였을까.

휴의는 조선의 독립보다 점례가 자신의 마음에 더 깊게 새겨진 것을 알고는 손에 뜨거운 것을 쥐고 있기라도 한 듯이 화들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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