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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봐온 얼굴이었으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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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봐온 얼굴이었으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29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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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은 경시정도 벌어진 상황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자기 방으로 급히 들어갔다가 권총을 손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는 경찰서 천장에 대고 총알 한 발을 쐈다. 밀폐된 공간에서 발사된 총알은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벽을 뚫고 옆으로 뜅겨져 나갔다.

경시정이 그렇게 한 것은 뒤늦게라고 순사부장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허둥대고 당황했던 경시정은 총알 한 발을 발사하고 나서 자신이 당장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총소리를 듣고 무슨일이 일어난 것을 직감한 순사들이 모여들었다. 모여든 그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떨어진 목을 보고 머리의 주인공이 순사부장이라는 것을 알고는 경악했다.

저 상태라면 스스로 그렇게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렇게 했다는 확신을 갖고 목을 자를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눈짓을 주고 받는 그들 가운데 누가 그랬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다시 바닥으로 향한 것은 몸통이에서 여전히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은 신발에 피가 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흐르는 피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서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보고 있는 떨어진 목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서로 놀라고 있었다. 그 때 경시정의 목소리가 경찰서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저놈을 체포하라.’

순사들은 저 놈이 동휴인 것을 알아챘다. 경부가 뒷걸음질 치고 있는 자신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걸어오다 발에 걸리는 목을 주어 벌벌 떨면서도 아닌 척 냉정을 유지하는 자신의 심복에게 건넸다.

‘순사부장을 잘 모셔라.’

가져가도 쓸데가 없는 물건이라는 듯이 목을 건넨 그는 바보가 저지른 실수가 아니지만 체포해도 좋다는 의미로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경시정의 방으로 들어갔다.

상황 파악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순사들은 본능적으로 서너 명이 총을 뽑아 들고 경부를 뒤따라 들어갔다. 경시정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너희들이 별수 있겠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리들 꺼져있어.’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방금 전에 체포하라고 소리쳤던 말을 잊었다. 그러면서 빨리 나가지 않으면 경을 치겠다는 무서운 얼굴을 했다. 들어왔던 문으로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급히 빠져나갔다.

이 사건은 상부에 보고됐다. 너무 늦지도 그렇다고 너무 빠르지도 않은 시간에 보고를 받은 조선총독부는 전시라도 그런 일은 흔하지는 않지만 일어난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라는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직통으로 연결된 전화를 통해 총독 관저는 경시정이 알아서 사건을 종결하라고 지시했다. 세 시간 후 경시정은 자신이 채운 경부의 수갑을 스스로 풀어줬다.

수시로 바뀌던 생각이 결론에 이른 순간이었다. 순사부장을 살해한 혐의는 정당방위로 바뀌었고 사건은 그것으로 끝났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다면 칼이 아닌 총을 쓰라는 조건으로 경부는 풀려났다.

‘넌 정당방위야, 나가봐.’

경시정이 말하면서 동휴의 등을 툭툭쳤다. 별거 아니니 털고 일어나서 하던 일을 마저 하라는 지시였다. 동휴는 나가는 대신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 조선식으로 조상에게 하듯이 큰절을 올리면서 경시정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동휴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

무릎을 꿇은 것은 명예를 더럽힌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고 만세를 부른 것은 새로운 명예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경시정은 경부가 하는 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경부가 고개를 들었다. 오 년을 함께 생활해 충분히 봐온 얼굴이었지만 처음 보는 얼굴처럼 낯설었다.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써먹겠다는 것이 그때 경시정의 속마음이었다. 자신도 독하지만 저런 독한 놈은 언젠가는 자신을 배신할 것을 확신했다.

그러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처치하겠다는 다짐도 해두었다. 그 다짐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또다른 다짐으로 이어졌다. 그만큼 그는 이 사건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동휴의 마음은 달랐다. 그는 정말로 경시정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었다. 아들이 되어 아버지의 목에 당장 매달리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자 그의 가슴은 칼에 정통으로 찔리기라도 한 듯이 심하게 떨려왔다. 정당방위는 언제든지 부하살해로 바뀔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경부는 경시정의 아들보다 더 한 것이라도 되고 싶었다.

이런 결정은 누구의 상의나 조언도 없이 순전히 경시정의 독자 판단에 따른 것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 마음은 확고해졌다. 그것이 고마웠던 동휴는 순사부장을 내리칠 때 다친 엄지손가락의 피로 ‘혈서로 맹세한다’는 충성 서약을 경시정에게 바쳤다.

‘친애하는 나의 아버지,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아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경시정은 받은 혈서를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두었다. 그날 저녁 술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 전 경시정은 서랍을 열고 혈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당신에게 매인 몸, 죽을 때까지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는 그것을 다시 서랍에 넣고 그 즉시 경부를 불러 새로운 순사부장을 추천하라고 명령했다. 동휴는 지체없이 자신의 심복을 지목했다.

순서로 보면 그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경시정은 알고 있으면서도 거절 대신 경부의 추천에 군말 없이 그를 신임 순사부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심복은 동휴처럼 두 계급 특진의 영광을 안았다. 술잔이 거나할 무렵 경시정은 동휴의 혈서 이야기를 꺼내 들었고 순사부장은 그 자리에서 자신도 천황을 위한 혈서를 쓰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취기가 오른 경시정은 '오늘은 혈서의 날이구나', 하면서 자신도 도마 위의 사시미 칼을 이용해 왼손 검지를 긋고 천황 폐하를 위해 피로서 맹세를 했다.

‘우리 셋은 지금부터 의형제다.’

그가 흘리는 피를 닦을 생각도 없이 그 말과 동시에 건배를 제의했다. 마지못해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동휴는 자신의 잔을 한 번에 비웠다.

‘형님, 아우의 잔을 받으십시오.’

경부가 방금 전에 자신의 손에 있던 잔에 술을 채웠다. 그가 잔을 입으로 가져 가자마자 탁하는 소리와 함께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보다는 형님이 듣기에 좋구나. 내가 성공하고 내가 불행해지는 것도 모두 이놈 때문이다.’

경시정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형님이 아우를 대하는 편한 마음으로 경부를 바라봤다.

‘제 잔도 받으십시오.’

그 틈을 노려 순사부장이 말했다.

‘도원결의를 맺었구나.’

이번에도 경시정이 단숨에 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빠르게 먹은 탓에 입가에 침인지 술인지가 턱으로 흘러내렸다.

동휴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수건이 아니 손으로 닦았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그 손에 묻은 피가 경시정의 입가에 지문을 남기듯이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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