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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는 운명을 생각했고 용희는 행운이 왔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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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는 운명을 생각했고 용희는 행운이 왔음을 직감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24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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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서 두 명의 미군이 걸어오고 있었다. 옆구리에 서류철을 끼고 한 손에는 파이프 담배를 문 이가 옆 사람을 보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상관인듯 싶었는데 듣는 사람이 연신 그쪽을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사람과 한마디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바싹 붙어서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의 모습은 폐허가 된 전쟁터의 모습과 기묘하게 어울렀다.

그들은 폐교를 사무실로 두고 막 회의를 끝낸 부대장과 참모였다. 그들을 호위하는 병사는 없었다. 옆구리에 각각 권총을 차고 있었으나 경계의 눈빛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안전지대 안에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점심을 방금 끝낸 그들은 배부름이 가져오는 포만감 때문에 걷는데 여유가 있었다. 그들이 용희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등나무 아래 벤치가 목적지인 듯 싶었다.

그들은 먹은 음식을 삭이면서 휴식을 원했다. 용희가 말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말수는 그때까지도 운동장 쪽이 아닌 그보다 더 위쪽에서 희미하게 나부끼는 성조기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미군의 승리가 가져온 전황과 자신의 운명을 대비시켜 놓고 있었다. 일본의 패망은 그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말수는 담담한 심정으로 가볍게 펄럭이는 깃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용희는 이번에는 더 세게 같은 자리를 찔렀다. 말수가 대답대신 정신을 차린 듯이 돌아보았다. 그도 연병장을 가로 질러 오는 두 명의 미군이 자신들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말수는 본능적으로 움찔했으나 곧 총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런 일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들이 먼저 눈치채고 놀라기 전에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써, 핼로우 하면서 용희의 손을 잡고 두 손을 하늘로 올렸다.

위험한 상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적절한 행동이었다. 해칠 의사는 커녕 항복하겠다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이런 식의 행동은 미군을 당황하게 했으나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닥칠 수 있는 위험은 어느 정도 제거됐다.

그러나 그들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권총을 빼고 천천히 자신들 쪽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손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고함도 이어졌다.

그들이 겨눈 총구 쪽에 바짝 다가섰을 때 미군들은 얼마 남지 않은 민간인이 위수 지역을 이탈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위장한 적의 잔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처음과는 달리 몹시 흥분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양쪽으로 갈라놓고 말수의 상의를 벗게 했다.

말수가 그들의 말을 따르기 위해 옷으로 손을 가져가자 병원을 상징하는 십자가 문양이 드러났다. 눈을 용희로 돌리자 용희도 역시 같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닥터?'

'예스 위 아 닥터.'

그런 짧은 영어가 이어졌고 그들 중 부관이 다가와 두 사람을 수색했다. 무기가 없음을 거듭 점검한 그들은 두 사람을 자신들이 데리고 온 사무실로 앞장 세웠다.

사무실 안의 의자에 앉아서도 말수와 용희는 머리 위의 손을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의사지 병사가 아니며 누구를 공격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서 너 명의 미군이 그들 주위로 몰려 들었다.

한 마디씩 뭐라고 지껄이더니 이내 부대장의 주의에 입을 닫았다. 그가 두 사람을 보면서 팔을 내려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말수는 비로소 고통을 끝내고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용희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으나 바뀌고 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었다. 심문에 앞서 그들은 음식과 시원한 주스를 내왔다. 적으로서가 아니라 우군으로 두 사람을 대하겠다는 태도였다. 피해를 주기보다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인식한 때문이었다.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은 결정적인 패배를 했다. 전쟁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싸움에 진 일본은 위기를 돌파할 힘을 잃었다.

두 달 전 전투에서 일본군 중 살아 있는 자들은 거의 다 죽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포로가 됐다. 부상병들은 마지못해 호의를 베풀고 싶은 미군에 의해 후방으로 옮겨졌고 나머지는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미군은 처음에는 두 사람을 같이 심문했으나 나중에는 따로 했고 그 다음에는 또 같이 했다. 진술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두 어 시간의 심문이 끝나고 미군이 내린 결론은 이들은 부부 의사로 일본군에 끌려온 조선 사람이었다. 이들이 원하는 행선지는 상해였고 종국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 중이고 민간인 의사가 전선을 마음대로 이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군들은 임시 병원에서 다른 의사들과 이들을 같이 생활하게 했다.

보름 후 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수송기가 베이징으로 떠나는데 같이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말수는 또한 번 운명을 생각했다. 용희는 자신들에게 행운이 왔음을 직감했다.

베이징에서 어떤 임무가 주어지고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몰라도 일단 섬에서 탈출한다는 오랜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은 조선과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 걸어서라도 갈 수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심리적으로 고향과 하나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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