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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들은 탈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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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들은 탈출하기로 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17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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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앓아누웠다. 며칠 모습이 보이자 않자 이사 온 사람들은 아예 길을 삽으로 뚝 잘랐다.

마치 무 자르듯이 잘라서 사람이 건너뛰어야 갈수 있도록 만들었다. 나중에는 이 땅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다.

측량을 해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돈이 드는 일이었다. 말수 네는 그런 돈도 없었고 돈을 내서 측량할 마음도 없었다. 수십 년째 사용해온 길이었다.

말이 안 나왔지만 우격다짐으로 나오는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날뛰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주재소에 근무하는 순사 가운데 한 명이 그들과 사촌지간이라고 했다.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다들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못된 사람의 충동질이 있었다. 끼리끼리 알아 본다고 그들은 서로에게 악마의 마음이 있음을 알았다.

허우대가 크고 말술을 하는 말수네 이웃집에 사는 그는 싸움 붙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들이 이사를 오자 길부터 끊으라고 종용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말수네와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원수진 일도 없었다. 나중에 사주한 자가 허우대인 것을 알고 말수 아버지는 죽일 놈이라고 혀를 찼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들은 작당을 하면서 말수 네를 고립시켰다. 바다를 가거나 일을 나가려면 반드시 그곳을 통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끊긴 길을 보면서 말수는 울분을 삭였다.

누구도 이 상황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분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들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슬슬 뒤꽁무니를 뺐다.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에 말수는 시무룩했다. 더 큰 문제는 이 상황은 고착되고 되돌릴 수 없다는데 있었다. 말수는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작은 아버지나 사촌형은 너무 착하고 나약해 그들에게 눈짓은 커녕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노망과 이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말수는 자신이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이 알게 됐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어느 날 허우대를 불러들인 악당은 길거리에서 술판을 벌였다. 말수는 모른 척하고 길을 돌아서 집으로 왔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웃는 모습은 모욕적이었다.

그날 밤 말수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계획한 것을 실천하려고 두 주먹을 쥐었다. 당장 달려들어야 한다. 더는 참을 수가 없다.

기다리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엄마의 판단은 틀렸다. 그들은 이웃이 아니고 원수다. 연놈 네 명을 감쪽같이 해치울 방법은 간단했다.

불을 질러 형체도 없이 태워 죽이는 것이었다. 이제 막 청년기를 맞은 말수의 심장은 세게 뛰었다. 그는 가져온 석유병을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흘려 넣었다. 석유가 나오면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전등불로 쓰는 비싼 석유가 마구 흘러갔다.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똑같은 방식으로 옆방에도 석유를 쏟아부었다. 불길이 번지면 먼저 깨어난 놈은 뒷문으로 달아날 것이다.

그걸 예상해 미리 나무 작대기를 받쳐 놓았다. 괴어 놓은 작대기를 힘을 주어 땅에 조금 박았다. 이렇게 하면 열리기는 하겠지만 단번에 열 수는 없을 것이고 허둥대면서 나오면 그때 손도끼로 찍으면 된다.

석유 대병을 골고루 쏟아붓고 나서 말수는 긴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멈추고도 싶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그는 성냥을 그었다.

불길이 흘러간 석유를 따라붙었다. 삽시간에 불은 방은 덮쳤고 술에 취한 남녀들은 뒷문으로 나오지 못했다. 도끼를 쓸 일이 없었다.

한 십분만에 초가지붕에 붙은 불은 서까래를 아래로 쏟아냈다. 그때까지 마을은 쥐죽은 듯했다. 아무도 불이 난 것을 알지 못했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말수는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뺐다. 달은 높이 떴고 바람은 동풍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낭패다. 달빛에 드러난 몸을 감쪽같이 숨기기 위해 말수는 달렸다.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급했다.

애초 산속에 숨어 있을까 생각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서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백구 럭키가 꼬리를 흔들었다. 뒤돌아보니 지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래 묵은 나무집이 삽시간에 불길을 먹었다. 그때쯤 돼서야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났다. 백구도 미친듯이 짖어대며 밖으로 나갔다.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죽어가는 자들이 지르는 소리인지 작은 일에도 잘 놀라는 마을 아낙이 내지르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날이 밝아왔다.

말수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가슴은 벌써 진정됐다.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 틈에 끼어서 무슨 일이냐는 듯이 호기심 어린 눈을 두리번거렸다. 불쌍한 그들을 위해 어른들처럼 혀를 끌끌찼다.

그날 오후 늦게 주재소에서 순사 두 명이 나왔다. 그들은 새까맣게 탄 네 구의 시체를 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마을 사람들은 화재가 아닌 방화라면 의심을 살까봐 묻는 말에 서로 선뜻 나서지 못했다.

시체의 주인과 사촌 간인지 아닌지 사람들은 순사들이 내뱉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조사하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알지 못했다.

형식적으로 조사를 마친 그들은 부엌에 있던 잔불로 인한 화재로 사건을 종결했다. 귀찮은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느님 용서해주세요. 한꺼번에 네 명을 죽였습니다.’

말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걱정마, 용희의 손이 어깨에 닿았다.

‘그런데 말하기를 잘했어. 속이 시원해.’

‘그래서 고해 성사가 필요해. 십자가가 왜 매달려 있겠어.’

‘맞아, 맞아.’

‘오늘 한 말은 죽을 때까지 하지 않기.’

‘그래야지. 우리 손 걸자.’

둘은 어둠 속에서 새끼손가락을 맞잡고 맹세했다.

‘용희야?’

‘어?’

‘더는 내 손으로 사람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장담하지마, 세상일이란 모르는 거야.’

‘아니야, 어떤 경우라도 더는 안 해.’

‘운명이 장난을 쳐도.’

‘응.’

‘알았어, 하지마.’

‘내일 이곳을 뜨자.’

‘더 할 일이 없어, 이곳에서는.’

‘그래, 그러지 뭐.’

용희가 맞장구쳤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는 이곳에서는 한시도 있을 수 없어.’

‘그래도 참아 눈을 뜰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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