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18 19:01 (목)
그는 같은 소재로 늘 다른 이야기를 꾸며냈다
상태바
그는 같은 소재로 늘 다른 이야기를 꾸며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12 11: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용희는 위안을 받았다. 어둠이 그렇게 만들었다. 침묵과 고요가 그랬다. 불쾌한 기분은 사라졌다.

다만 딱지가 지면서 생기는 가려움증이 올라왔다. 어깨에서 시작한 것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다리를 긁다가 긁은 손으로 다른 손을 긁었다.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긁는 걸 포기한 용희는 꿈틀거렸다. 그녀에게 속한 것은 모두 가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징조가 아니었다. 살았다는 삶의 기운이 보내는 신호였다.

말수가 용기를 보탰다. 기력을 대부분 찾은 그는 용희를 달랬다.

‘여긴 안전해. 가려우면 맘껏 긁어. 피가 나면 좀 나을 거야.’

그래서 그 말을 용희는 따라했다. 피가 나니 좀 나은 듯 했다. 피묻은 손을 용희는 코 끝으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코가 가려웠기 때문이다.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용희는 긁는 것을 포기했다. 

용희가 체념하자 말수가 바스락 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찾던 것을 찾았는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차가운 금속성 같은 느낌이 용희의 입술에 닿았다. 시큼한 냄새였다. 부패로 썩어 가는 것이 아닌 막 피어나기 위한 봄의 새싹 같은 것이 코를 간질였다. 

가려움과는 다른 것을 느끼며 용희는 입을 벌렸다. 포도주 한모금이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광야에 쓰러진 선지자에게 들어간 바로 그 생명수였다.

꿀꺽 소리가 났다. 제소리에 놀란 용희는 이제 제대로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말수는 한 모금 더 그녀가 먹을 수 있도록 목을 받쳐 들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많은 양이 목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순간은 짤라 였으나 길고 긴 폭포수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렸다. 용희는 이제 자신이 병을 잡아 들었다. 뺏듯이 그렇게 한 것은 남은 것을 한꺼번에 마저 먹기 위해서였다.

말수는 말리지 않았다. 자신도 깨어나서 한 일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말수는 정신을 차렸다. 용희도 그런 과정을 밟고 있었다. 가려움은 잊었다. 사라진 것인지 어디 숨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목을 타고 내려간 물줄기는 갈라진 논을 금세 흠뻑 적셨다. 말랐던 모들이 그 순간 푸른 잎을 달고 위로 곤추섰다.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빨랐다.

그와 동시에 용희는 등뼈를 세웠다. 모든 것은 명확해졌다. 이곳은 포격으로 무너진 성당의 지하실이었다.

‘삼 일은 지났을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말수의 목소리였다.

지하실은 완벽한 피신처였다. 건물은 부서져 폐허가 됐다. 그곳을 빠져 나가려던 신부와 신도들의 시체는 계단에서, 창가에서 그대로 거꾸러져 있었다.

부패한 시신의 흔적이 간혹 갈라진 틈으로 들어왔으나 촛농이 그것을 해결했다. 초가 타는 냄새는 좋았다. 말수도 용희도 그런 느낌이었다.

적들은 혹은 아군들은 더는 성당을 폭격하지 않았다. 시체위에 포탄을 쏟아 부을 이유가 없었다. 공격지점에서 성당은 지워졌다. 너무 비참해 군인들도 외면했다.

그래야 된다고 믿었다. 행군하던 그들은 기습공격을 받아도 그곳으로 피신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엎드리면 바로 앞에 눈을 뜬 시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직 살점이 붙은 곳에는 개들이 달라붙었다. 차라리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적에게 달려가는 것이 나았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 포기할 만큼 성당 주변은 지옥이었다.

그러나 버려진 곳에서 생명이 꿈틀거렸다. 다행히 그곳에는 산소가 들어왔다. 일 층으로 오르는 통로를 사이로 작은 틈이 생겼다.

말수는 본능적으로 계단을 찾았고 그곳에 쌓인 잔해들을 치웠다. 안전 통로도 확보했다. 그리고 그곳을 공기 통로만 남겨둔채 다시 매웠다. 이제 성당의 지하는 그들의 안식처가 됐다.

전투 식량도 있고 물도 있고 술도 있고 통조림도 있었다. 누구도 살지 못하는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멀쩡했다. 홀로 살았다는 안도감이 두려움을 저 멀리 밀어냈다.

말수는 이 곳에서라면 일년도 너끈히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섣부른 행동을 자제했다. 밖으로 나가 동굴에 숨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벗어나면 죽고 가만히 있으면 산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말수는 포도주 한 잔으로 속에서 불이 나고 있는 용희를 다독였다.

'물 좀 줘.'

말수는 움직이지 않고 손만 뻗어 그것을 대령했다. 어둠 속에서도 물과 술과 음식이 어디 있는지 말수는 한 번도 실수 하지 않았다.

물은 포도주와 달랐다. 그것은 아래로 내려갈 때 편안했다. 깡통 따는 소리가 들렸다.

'한 입만 먹어. 한꺼번에 배부르면 죽어.'

한동안 잊었던 죽는다는 말을 용희는 떠올렸다. 그래 죽음이다.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용희는 알았기에 죽음의 소리는 그녀에게 살아야 겠다는 강한 용기를 주었다.

'여기서 한 발작도 안나가.'

용희가 말했다.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말수가 받았다.

두 사람은 이 생각에 다른 이견이 없었다. 전쟁은 오래지 않아 끝난다. 말수는 직감으로 그걸 알았다. 끝날 수 밖에 없다. 오래 끌었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 끝나면 그 때 나가자.

'오케이.'

용희가 대꾸했다. 그러고 나서 용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말수는 입을 열었다. 통영 뱃놈의 생활을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또 그 소리.'

'그래, 또 그 소리야.'

말수도 지지 않았다.

'어려울 때 고향을 그리면 힘이 나.'

용희는 또 그 소리라고 싫은 소리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매번 다른 이야기로 그녀를 자극했다.

그가 들려주는 뱃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 마치 천국의 세상이 하늘이 아닌 바다에 있다고 믿었다.

저희들끼리만 아는 노래를 부르면서 먼저 죽은 넋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까지 자신들의 생명을 길게 가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비는 대목에 이르면 말수는 저절로 어깨를 들썩였다. 그가 부르는 뱃노래는 구성지고 갸날프고 힘이 셌다.

그때는 신성한 그 무엇이 말수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는 진지했고 담담했으며 의욕이 넘쳐 흘렀다.

그는 근방에서 제일 유명한 사제를 불러 고해성사를 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다. 교황청의 교황보다도 이름을 날렸다.

우스웠다. 그의 입에서 하느님이 터져 나왔다. 그는 아무말이나 했다. 치부를 들추어 내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처음 들어보는 공포에도 사제는 모두 용서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