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4 18:59 (수)
그는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상태바
그는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09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러나 실수인지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광통교에서 ‘임마’라는 호칭으로 굴욕을 당했던 말 탄 순사는 입맛이 써 도무지 밥 먹을 기운이 없었다.

오사카에서 조선에 온 지 3년 만에 듣는 욕설이었다. 순사인 주제에 어느 놈인지도 모를 자에게 ‘임마’라는 소리를 듣고 그만 선생님 하면서 넙죽 엎드렸던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종로경찰서로 복귀하는 대신 순찰을 돈다는 명목으로 두 명의 일경은 다시 청계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바야시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자신을 굴복시킨 그 젊은 남자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에 고바야시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설사 있다고 해도 그와 고바야시가 정말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알아야 했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들이 국숫집으로 막 들어섰을 때 진짜 고바야시도 그곳에서 일행과 뒤늦은 점심을 들고 있었다.

고바야시는 풀이 죽은 그들과는 달리 한껏 기분이 고조된 상태였다. 검사의 어머니를 우연치 않게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여기면서 일행에게 점심값을 대신 내겠다고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검사가 조선에 당도하기 전에 그 어머니에게 쓸 수 있는 호의를 다할 작정이었다.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총독부 고바야시의 친절을 이야기한다면 그 아들은 자신의 앞날을 보장해 줄 것이다.

고바야시의 넓은 얼굴이 더 넓어졌다.

‘어서들 들어,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고바야시가 소리쳤다.

그 옆방에는 두 명의 일경이 힘없는 젓가락질로 수치를 만회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대화를 통해 진짜 고바야시가 자신들의 옆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이 쉽게 풀리고 있었다. 오전의 실수를 만회할 절호의 찬스였다. 우연치고는 기이한 우연이지만 이 우연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들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고바야시 일행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조급하게 행동했다 또다른 실수를 저지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바야시 총감님 맞으시죠.’

정복을 입은 순사 두 명이 구두끈을 신고 막 일어서는 고바야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고 존경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고바야시가 눈을 들었다. 감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국의 순사들이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어, 그래 니들이 고생이 많다.’

고바야시는 대뜸 반말을 하면서 일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총감 고바야시라는 것을 니들이?’

어떻게 아느냐는 뒷말을 더 듣기도 전에 두 명 중 한 명이 우연히 대화를 엿들은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았다.

고바야시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니들 소속이.’

‘종로경찰서 정찰본부 수색1팀입니다.’

‘그래, 나중에 내가 한 번 찾아가마.’

고바야시는 볼 일을 다 봤으니 이제 가봐야겠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공손하게 손을 모았던 일경이 고바야시에게 무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눈짓을 주었다.

사람들 있는 곳에서 하기 어려운 어떤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였다. 눈치 빠른 고바야시가 시계를 들여다 보면서 잠깐이라면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람들을 피해 잠시 옆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일경은 고바야시의 귀에 손을 모으고 조금 전에 있었던 검문 과정의 일을 조용하게 그러나 상세히 설명했다.

젊은 청년을 검문하는 과정에서 총감님 이름이 나와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이 간다며 혹 젊은 조선 청년을 아느냐고 물었다.

키와 몸매와 눈초리를 설명하는 것을 자세히 듣던 고바야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래 나도 좀 전에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할머니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그렇다면 혹시 그 여자도 그 자와 한패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릎을 딱 쳤다.

고바야시는 넓은 얼굴에 점처럼 박힌 작은 눈을 번득이며 외워 두었던 할머니 주소를 그들에게 적어 주면서 급히 그곳을 찾아가라고 무슨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일경에게 말했다.

그들은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이럇을 외치는 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울려 퍼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