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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08:19 (금)
모닥불로 뛰어들기를 기다렸던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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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로 뛰어들기를 기다렸던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07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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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와 헤어지고 난 후 할머니는 우체국을 뒤로 두고 황실 다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휴의가 다방을 지나쳐 경성우체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다. 접선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심장의 박동이 다시 요동쳤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숨을 골랐다. 

휴의의 뒤를 고바야시 일행이 바짝 다가서고 있어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는 고바야시가 필경 휴의를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휴의가 더 위험해 보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그녀는 품안의 권총을 만지작 거렸던 것이다.

여차하면 일경을 저격한 후 휴의를 구해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최후의 순간에나 할 짓이었다. 총소리가 나고 도망자와 추격자가 대낮 종로 한 복판에서 쫓고 쫓기는 형국이 벌어지는 상황은 이미 일을 그르친 것이다.

제발 너를 사용하는 일이 없기를, 그녀는 금속의 쉿덩이에게 자식을 대하듯이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접선은 적이 모르게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애초 목적은 일경 한 두 명을 죽이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에 맞는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자금에 쪼들려 와해 상태에 있는 상해 임시정부를 살리는 것이 급했다.

휴의가 죽든 아니면 할머니가 죽든 둘이 죽든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은 작전의 실패를 의미했고 임정의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돈 보따리를 받고 무사히 상해로 잠입해야 한다. 그 순간 할머니의 발걸음은 무겁기도 했고 가볍기도 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성공해서 요인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장면이 겹쳐졌다.

다행히 그녀는 고바야시를 따돌렸다. 더구나 그와 안면까지 텄으니 유사시에 도움을 받을 것이다. 위기가 되레 기회를 준 셈이다.

할머니가 이런 생각을 빠르게 하고 있을 때 고바야시 역시 만연의 웃음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조선 땅에서 그가 할 일은 많고 많았으며 이곳은 그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조선에서 돈과 명예를 얻고 은퇴한 후의 도쿄 생활에 흡족한 그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휴의가 자신의 이름을 팔고 위기를 모면한 사실과 할머니 역시 자신을 이용하려는 속셈을 모른 체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휴의의 본능에 따른 결과였다. 그가 체포되지 않고 빠져 나갔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바로 황실 다방을 들르지 않은 것은 휴의가 내린 신의 한 수였다. 만약 그가 그곳에 들어갔다면 접선자는 물론 그도 체포되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다방의 모든 시선은 흉악범에 쏠리고 그는 포승에 묶여 대로변을 따라 끌려가고 있다. 몸을 부르르 떤 휴의는 수인으로 감방에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털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상금에 눈이 먼 내부 고발 건은 없었다. 접선이 탄로 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경은 광화문과 청계천 일대를 매일 이잡듯이 검문하고 있었고 특히 담배 연기가 자욱한 다방을 집중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한바탕 소란을 겪고 한 황실 다방은 다시 활기가 넘쳐났다. 일경이 들이 닥치기 건에 그곳을 빠져 나온, 옷가지를 싼 보자기를 들고 있었던 중년의 여성은 보채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국수집에서 뒤늦은 요기를 하고 있었다.

휴의가 떠난 지 불과 1시간여 만이었다. 6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는 제 얼굴보다 큰 그릇을 들어 마지막 국물까지 다 먹고 나서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그 제서야 한 시름 놓았다는 듯이 다시 황실 다방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휴의와 할머니, 아주머니 세 사람은 이렇게 간발의 시차를 두고 광통교에서 황실 다방을 오고 갔다. 일이 벌어진 것은 안 사람은 할머니 한 명뿐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갈 구멍이 없은 밀폐된 장소를 벗어나야 작전의 성공이 가능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장소를 다방이 아닌 종각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황실 다방이 실패로 돌아가면 세 시간 후인 저녁 5시 30분으로 정한 플랜 B를 작동했다. 그것은 사전에 연락된 것이었다. 할머니의 판단이 옳았다. 불나방처럼 모닥불로 뛰어들기를 기다렸던 일경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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