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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0:17 (금)
그는 알아 들었다는 눈 짓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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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알아 들었다는 눈 짓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01 0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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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휴의는 먹기전에 눈으로 말린 가락이 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약간 숙이자 코가 아래로 따라 내려오면서 멸치를 우려낸 국물에서 입맛을 당기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식욕을 당기는 모양과 냄새, 먹음직 스러운 것이 맛도 좋을 것이다. 검문에서 벗어난 탓에 긴장이 풀렸는지 휴의는 젓가락을 집자 마자 한 번 감아올려서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후루룩거리는 소리를 휴의는 들었다. 이 소리는 듣기 좋았다. 찰진 면발이 적당한 온도와 만나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고 돌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먹던 그 맛이 갑자기 생각났다. 일경에게 쫓겨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가 삼일 만에 먹던 그 국수 맛이었다.

맛이라는 것은 이렇게 위급을 벗어났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편하고 느긋할 때라면 진정으로 이 맛을 느끼지 못한다.

먹다 말고 휴의는 국수 한 그릇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탐색했다. 그러다가 훗훗, 하고 가볍게 웃었다. 옆 사람도 눈치채지 못한 가벼운 것이었으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것이었다.

일경을 따돌린 만족감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애초 휴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숱한 경험으로 순사들이 어떻게 나오고 그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겪었던 그를 순사 정도가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휴의는 잠깐 긴장했었다. 그 순간이 또 오면? 휴의는 먹다 말고 그때는 이렇게 하지 뭐, 하고 여유를 부렸다.

닥치지 않은 일을 먹다 말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가 그 수법을 한 번 정도는 더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임마.’

참 좋은 우리말이었다. 이놈, 하고 불렀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나 있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제국의 경찰이 임마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속으로 임마를 따라 부르면서 잘못 걸려들었다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사람을 보고 검문을 해야 했어야 했다. 아무나 붙잡고 신분증을 요구한 자신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탓했다.

낮잡아 부를 수 없는 존재는 과연 얼마나 큰가. 그의 입에서 고바야시가 나왔을 때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만한 게 다행이다. 그들은 휴의가 돌아가고 난 뒤 이런 마음으로 종로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쭉 처진 어깨를 보는 행인들은 그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으러 가거나 좌천된 것으로 알았다.

선생님, 하고 얼른 받은 것은 순발력이었다. 그 말을 한 순사는 내가 그렇게 해서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을 다행으로 알라고 다른 일행을 윽박질렀다.

둘은 이날의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실수를 드러내 위신을 추락시킬 이유가 없었다. 의기투합이 끝난 그들은 더는 심문을 하지 않고 교대 시간을 기다렸다.

그 시각 식사를 마친 휴의가 막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누군가의 시선이 등 뒤에 박혔다. 뒷자리의 신사 두 명을 휴의도 의식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휴의는 잊은 것이 없나 살피는 시늉을 하면서 잠깐 뒤로 눈길을 주었다. 그들 중 하나가

‘아리 아리 아리, 아리랑.’

들릴락 말락 한 소리를 내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라기보다는 이 사이로 나온 의미 없는 재채기 같은 것이었다.

입술을 약간 벌리고 혀가 입천장을 가볍게 세 번 가볍게 때리고 한 번은 혀를 둥글게 마는 동작이었다.

정확하게 아리를 세번 부르고 아리랑을 한 번 외친 후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저 식사에 열중했다. 휴의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친사람이었거나 혼자 중얼 거리는 이상한 사람 취급했을 것이다.

국수 가락을 넘기는 쩝쩝거리는 소리가 방금 전에 했던 아리 아리 아리 아리랑과 겹쳐 묘한 소음으로 순식간에 변했다.

눈이 마주치지 않은 상태라면 들을 수도 없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이상한 소리.

'아리 아리 아리 아리랑.'

그러나 그 소리는 백만금의 가치가 있었다. 바로 상해에서 받은 암호였던 것이다.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휴의는 알아 들었다는 듯이 눈짓을 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광화문 쪽을 향해 발길을 천천히 돌렸다.

그들이 계산을 하고 따라 나와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휴의는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드디서 자신이 경성에 온 목적을 달성할 기회가 왔음을 실감했다. 

뒤돌아보지 않았으나 두 명의 신사도 국숫집을 나와 따라 온다는 것을 휴의는 알았다. 경성우체국 못미쳐 인황 찻집으로 가야한다.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접선자와 접촉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무슨 일이 일어날 때면 하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묵직한 권총의 쇠뭉치가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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