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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의 중간쯤에서 휴의는 말 탄 순사들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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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의 중간쯤에서 휴의는 말 탄 순사들과 마주쳤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5.25 0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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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들은 짧은 만남 뒤에 헤어졌다. 점례는 애초에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갔고 휴의는 몸을 돌려 광통교 쪽으로 향했다.

점례는 조금 아쉬웠다. 궁금한 것을 속 시원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가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그런 생각을 거두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낸다면 모를까 하기 싫어하거나 감추려고 할 때는 모른 척 하고 넘어가는 것이 순리였다.

점례는 그가 스스로 말할 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고 해도 점례는 휴의가 하는 일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의 일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일이 있다. 휴의처럼 점례 역시 예전의 시골뜨기 점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일상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 그녀에게 제일 중요했다. 전시회 준비를 차질없이 하고 유지가 돌아오면 결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작업의 마무리에 박차를 가했다. 유지와의 재회가 삶에 어떤 변화를 줄지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닥쳐서야 해결될 것이었다.

아무리 이러고 저러고 생각한 들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유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남자면 남고 일본으로 가자면 그러면 된다.

반면 전시회는 그녀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삼촌은 이미 심사위원들에게 점례의 그림 여러 점을 보여줬다. 그림의 배경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이런 그림을 조선에서 본다는 것은 행운이라고도 했다. 출품도 전에 그녀는 이미 조선미술전람회의 특등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삼촌은 그녀의 일본 유학 생활도 상세하게 묘사했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론과 실기가 겸비된 점례의 존재는 조선 화랑가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그녀의 그름은 그럴 가치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 생활, 그것은 과장된 것이었다. 아니 거짓이었다. 일본에 가본적이 없었다. 점례는 그럴 의도가 없었으나 유지가 편지에 그렇게 썼고 편지를 읽고 삼촌이 철썩같이 믿은 것이다.

유지는 도쿄와 그곳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에 대해 늘 말해왔다. 그것은 일종의 세뇌였다. 점례는 누가 물어보면 유학생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한 것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유학생보다 더 유학생의 실체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향수병은 없었어?’

점례의 사생활에 대해 거의 묻지 않던 삼촌이 어느 날 이런 질문을 했다.

‘1년 넘게 있으면 고향 생각도 날 법 한데. 안그래?’

대답대신 그것에 걸려 한동안 고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때 점례의 표정은 어두웠다.

삼촌은 더는 묻지 않았다. 이처럼 점례는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 같은 체험을 간혹 했다. 그래서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그것은 때로는 경험이 됐다.

그러나 점례는 자신이 나서서 먼저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물어보면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다행히 삼촌도 편지글 외의 것에는 궁금한 점이 없었다.

점례는 부끄러웠으나 그것이 절대 필요하고 그것이 없으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유지의 뜻을 소극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아무리 그림이 훌륭해도 바탕이 없으면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그녀는 놓았던 붓을 다시 들었다. 붓 하나로 그녀는 조선 최고의 자리에 아미 올라있었다.

휴의를 만나고 조금 심란했던 마음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평온을 되찾았다. 그것이 점례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점례는 벌어진 일에 대해 쉽게 적응하는 편이었다.

수년 만에 불쑥 나타난 첫사랑 휴의가 왔음에도 점례는 다음날에 그의 존재를 거의 잊었다. 종일 이 층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완성해야 하는 유화의 마지막 작업에 몰두하느라 휴의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붓을 물에 털어놓은 뒤 기지개를 폈다. 그러면서 아예 휴의가 다시 그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없었던 지난 생활에 그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되레 그가 있음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그녀는 오늘 같은 일상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인생이 그녀가 누리는 최고의 순간인지도 몰랐다. 안정적인 생활과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이런 시기가 전 생애에 걸쳐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하는 일마다 일이 척척 진행됐다.

이번 가을 전시회에서 수상하게 되면 그녀는 조선의 최고 여류화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다음 해 봄에는 도쿄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잇따라 프랑스에도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그녀 계획이라기보다는 삼촌이 짜 놓은 일정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 유지는 서양 화가들 특히 파리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생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 해왔다.

그래서 어느 날 삼촌이 그런 일정을 이야기했을 때 점례는 놀라지 않았다.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 점례는 확고한 인생의 목표가 휴의로 인해 틀어지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하루만에 휴의의 존재를 잊고도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에 그가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무시하거나 모른 척하기보다는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적어도 전시회 전까지는 나타나지 말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그 이후는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휴의도 동의할 것이다. 시간을 벌면서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는 차후의 일이었다.

점례가 이런 생각에 빠진 반면 휴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제, 어디서 같은 약속을 잡지 않았으나 잡은 것보다 더 여유가 생겼다. 점례가 있는 곳을 알았으니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다.

짧은 다리를 중간쯤 건넜을 때 저쪽에서 말을 탄 일본 순사들이 다가왔다.

휴의는 본능적으로 흠칫 놀랐으나 태연하게 앞을 보고 걸어갔다. 눈길을 피하거나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잡아 세워서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묻는다고 해서 당황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설사 무언가를 꼬치꼬치 묻는다고 해도 준비된 말을 술술 불면 될 것이다.

입안으로 그는 여러 질문에 답을 해놓은 상태였다. 휴의는 몸가짐의 동요 없이 다가오는 두 명의 말 탄 순사를 향해 마주 걸었고 그들의 사이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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