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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쫓기는 자의 혈관에 따뜻한 피가 순간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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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는 자의 혈관에 따뜻한 피가 순간 흘러내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5.23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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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봐, 사람 무안하게.’

‘네 눈속에 들어가고 싶어.’

‘무슨 미친 소리야, 눈 속에 눈이 들어오다니.’

‘그럴 수 있어. 네 눈은 크거든.’

같잖은 소리 하지두 마.

‘무슨 소리, 작고 가는 내 눈은 네 큰 눈 속에 풍덩 빠져.’

‘푸하하하.’

휴의는 이런 대화를 기억해 냈다.

아니다. 결코 이런 말을 섞은 적 없다. 그는 지금 점례와 이런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다. 왜 그때는 이런 멋진 말을 하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더 근사한 말들이 꼬리를 물었다.

‘너, 그거 알아?’

갑자기 질문을 하자 그녀가 당황했다.

준비하지 못한 것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휴의가 점례는 미웠다.

‘뭘 말이야.’

‘몰라서 물어.’

‘어.’

그 말을 하고 점례가 혀를 내밀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을 때 그녀는 곧잘 이렇게 했다.

'내가 널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게 뭔데, 말해봐.'

'무안하게 꼭 말해야 하니.'

'어.'

휴의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그를 앞질러 가고 있었다. 휴의는 멀찍이서 다시 점례를 뒤따랐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안보는 척 뒤도 확인했다.

자기 보호 차원에서였고 이것은 미행의 정석이었다. 미행하는 자신을 미행하는 다른 미행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휴의는 이제 그녀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의 걸음걸이를, 그녀에게서 풍기는 그녀의 태도에서 확신했다. 처음으로 사랑했고 처음으로 맹세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는 용기를 냈다. 빠르게 지나가면서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인파에 쓸린 것처럼 했으나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점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점례야 내다 휴의다. 멈추지 말고 그냥 가.’

휴의는 만사에 안전을 기했다. 만주에서 경성까지 자신을 뒤쫓고 있는 일경이 있을지 알지 못했다. 그가 잘못돼 점례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자신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점례를 확인하고 나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점례를 걱정했다.

‘내가 잡히면 점례도 무사하지 못한다.’

휴의는 옷깃을 세우면서 긴장을 감추려고 했다. 몸에 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점례는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걸으면서 점례는 휴의의 존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누구를 급히 피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면 무엇이 잘못됐기 때문일까. 그는 죽마을에 있지 않고 왜 경성에서 자신의 옆을 따라 걷고 있지.

내가 떠날 때 그는 가게를 보살핀다는 이유로 입대도 미루고 있었다. 동휴처럼 순사의 길을 가지 않는 그를 책망했던 기억에 점례는 그가 순사가 아닌 순사를 피하는 신세라고 짐작했다.

이런 식의 만남과 이런 식의 처지에 대해 점례는 난감했다. 어두운 구석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조심해야 하는 사람은 대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었다.

‘그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

불쑥 나타나서 하던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처럼 급하게 행동할까.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유지 호사카도 그림도. 그러나 그녀는 좀 전에 휴의가 그랬던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한시도 잊을 적이 없던 내님이 왔다.'

오매불망 자나깨나 그리워했던 휴의가 아니던가. 그의 목소리, 내다 휴의다, 그 목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이제 그것이 이뤄졌다.

위안부 막사에서, 유지 호사카와 함께 하던 장교 숙소에서 만주 청년과 함께했던 삼일간의 생활에서도 휴의를 잊은 인물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허상이 아닌 실체였다. 그 실체가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온몸이 떨려왔다. 이때는 이성이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기 마련이다.

'휴의, 날 좀 봐.'

그녀는 멈춰서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중절모를 들어 올렸다. 틀림없었다. 언제나 내 곁을 맴돌던 그였다.

한시도 품에서 놓친 적이 없는 휴의가 살짝 웃었다. 그는 팔짱낀 점례의 손을 짧게 잡았다 놓았다. 쫓기는 자의 혈관에 따뜻한 피가 순간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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