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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3 19:44 (화)
그녀는 동행자 없이 홀로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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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동행자 없이 홀로 걷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5.20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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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는 때때로 변장을 했다. 중절모를 썼다가 벗었다가 지팡이를 들었다가 우산으로 바꾸기도 했다. 콧수염을 기르기도 했다.

본국에서 온 거상의 이미지가 필요할 때는 말끔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한가지 모습보다는 자꾸 바꾸는 것이 신분을 위장하는데도 용이했다.

붉은 넥타이를 매고 하얀 와이셔츠를 각지게 다린 휴의가 밖으로 나섰다. 허리에 찬 비싼 회중시계의 금줄을 상대가 볼 수 있도록 양복의 앞 단추는 채우지 않았다.

잘 닦은 검정 가죽구두는 반짝였고 안경 너머의 눈은 여유가 넘쳤다. 접선은 지연되고 있었다.

독립군에게 거금을 지원하겠다는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만주에서 경성에 온 지 세 달이 지났다. 상해 임정에서는 연락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실패를 염려했다.

사전에 정보가 누설된 것은 아닐까. 만일 발각됐다면 휴의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 회의를 거듭한 임정은 일단 본부를 다른 곳으로 급히 옮겼다.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주소지에는 요인 하나가 하루에 한 번 들러 도착 여부를 확인했다.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휴의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곳 사정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일경의 검문은 시도 때도 없이 진행됐다. 

‘작전은 성공했다. 열흘 후에 도착.’

휴의는 보낼 암호문을 여러번 확인했으나 그것이 자꾸 뒤로 미뤄지자 거금을 댄다는 독립군 후원자에 대한 의심의 마음도 들었다. 일경이 놓은 덫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휴의는 몸가짐을 더 조심했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해주는 밥만 먹으면서 숨어서만 지낼 수는 없었다. 줄 댄 접선자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휴의는 인사동 고물상들과 안면을 텄다.

화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림도 여러 장 샀다. 받아온 자금이 바닥날 조짐을 보였다. 점례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일등 화랑의 점원이 점례가 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주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조선 처녀가 이번 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데 벌써부터 일등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녀는 만주에 가기 전에 일본에 유학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일등 화랑에 취업했고 일본인 주인의 지원 아래 유화 10여 점을 한꺼번에 내놓게 됐다고 했다.

휴의는 직감했다. 만주라는 단어 한마디에 그는 점례를 떠올렸다. 일등 화랑에는 그도 서너 번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가게에는 주인과 병색이 짙은 주인 아내 말고는 점원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방문했을 당시 심부름을 갔거나 다른 이유 때문으로 점례의 부재를 휴의는 짐작했다. 

그래서 할 일이 없는 날에는 멀찍이서 화랑에 들고 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한 끝에 드디어 점례로 추정되는 인물이 화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챙이 큰 모자를 썼고 양 옷을 입고 안국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휴의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옆으로 벌어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걷는 폼이 점례와 비슷했다. 체형도 그랬다.

‘점례다. 점례.’

속으로 점례를 두어 번 부른 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아직 까지는 동행자 없이 홀로 걷고 있었다. 가다가 누구를 만나 목적지로 갈지도 몰랐다.

휴의는 급해 오는 자신을 다독여야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크게 요동치고 있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오고 가는 인파가 많아 그녀를 뒤따르는 것이 어려웠으나 그런 와중에도 휴의는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급하게 몇걸음 걸었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제 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까워 졌다. 그는 당장 불러 세워 볼까 하다가 멈칫했다. 그녀를 확인하는 일은 뒤로 미뤄졌다.

그녀가 또 다른 화랑의 문을 열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 참 후 그녀는 나왔다.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화랑이 아니라 화구를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림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곳을 나와서 일등 화랑으로 가는 대신 가던 방향으로 계속갔다.

그녀를 미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능과 경험으로 휴의는 지금이 말을 걸 수 있는 적기라고 여겼다. 길을 하나 건너면 이쪽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종로경찰서 주위를 감시하는 일경들의 순찰이 자주 일어난다. 그녀가 어디로 향하든 이쯤이라면 잠깐 대화하기에 무난했다.

이름을 불러 확인하기 전에 휴의는 그녀를 앞서 지나갔다. 용의주도한 행동이었다. 어깨를 스칠 때는 옆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10여 걸음 앞선 다음 잠깐 멈춰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늉을 했다.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척했다.

그러면서 눈은 걸어오는 여자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 이마를 가린 챙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큰 눈을 확인해야 한다. 점례는 다른 누구보다도 눈이 컸다. 호기심 많은 눈으로 그녀는 휴의를 쳐다봤고 그에게 커다란 눈에 담긴 의미를 전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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