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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10-06 18:20 (목)
그녀는 편지를 들고 일찍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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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편지를 들고 일찍 집을 나섰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5.13 0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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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일찍 일어난 점례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거울속의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뽐내는 듯이 얼굴을 이러저리 돌려 보았다.

'흥, 실제가 더 이쁘지.'

그녀는 혼잣말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점례는 이제 완연한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의 기품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점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하루가 상쾌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하는 일도 진척이 있고 여기 일도 이제는 편안할 정도로 안정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때 사람들은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는 법이다. 그녀는 거울 앞으로 몸을 끌어당겼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유지가 이런 머리 스타일을 좋아했지.'

뒤로 땋아서 들어 올린 머리에 비녀를 꽂은 모습을.

점례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는 대신 거울을 당겨 얼굴을 비춰 보았다. 이마의 잔털이 막 들기 시작한 햇살을 받아 노랗게 빛났다. 은빛 비녀 역시 은은한 색으로 물들어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본국 여자들도 이랬으면 좋겠어.’

그는 점례가 오늘처럼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상을 물리자 이런 말을 하면서 조선 여자들의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점례는 그 말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인 줄 알고 있지만 비교하는 것 같아 그렇게 좋아하는 시늉을 하지는 않았다. 입을 샐쭉 앞으로 내밀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보니 자신이 보아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래 역시 유지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그는 예술가의 기질이 충만해.’

그녀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유지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고 쓴 내용을 한 번 더 다듬어 보았다. 전선의 유지가 기뻐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당신이 칭찬했던 그 스타일로 머리 모양을 냈으니 상상해 보라고. 자신은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이니 어디서든 나를 만나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고.

'사랑하는 당신'

나는 이곳에서 전쟁의 두려움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당신의 고마움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당신을 두고 나만 홀로 와서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웃음을 주세요. 살아 돌아와서 그렇게 해주겠다고 꼭 약속해요. 당신은 전쟁보다는 예술을 해야 합니다. 총은 어울리지 않아요. 사람은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제 길 대신 다른 길을 가고 있어요. 최전방을 고집한 당신의 천황을 향한 충정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전선에서만 꼭 애국하는 것은 아니 잖아요. 당신은 도쿄나 조선에서 얼마든지 애국할 수 있어요. 총칼 대신 펜이나 붓을 잡아요.

그러니 아버지께 연락해 이곳으로 속히 오세요. 제 욕심만 차린다고 나무라지 마시고요. 살고 나서야 애국도 있고 예술도 있는 겁니다. 아녀자의 섣부른 호소라고 여기지 마시고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더 큰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여기까지 쓰고 나서 점례는 가만히 있었다. 눈물이 흘러 더는 써 내려갈 수가 없었다. 창가는 이제 훤하게 밝았다.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 소란이 일고 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다시 창가로 갔다.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과연 분주히 움직였다. 저들은 각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저 속에 유지가 있어 자신을 찾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유지를 대생하고 싶다. 주변은 흐릿하게, 유지는 뚜렷하게 윤곽에 힘을 주면 좋은 거리 풍경이 될 것이다.

눈물을 닦은 점례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마무리를 서두르고 싶다. 더 길게 늘어지면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편지를 끝내면 좀 전에 구상했던 데생을 하자.

그래야 심란한 마음의 혼란이 가라앉는다. 내 생각은 충분히 정리했다. 결정은 그가 할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는 언제든지 귀국을 할 수 있고 전선에 더 남아 있을 수 있다.

그가 비록 직접 전투를 하지 않고 벙커에서 작전을 지시하는 참모장 역할을 한다고 해도 위험은 언제나 가까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경성에서 나나미 점례가'

점례는 점례 앞에 나나미를 붙여넣어 유지가 자신에게 준 일본식 이름을 일부러 눈에 띄게 했다. 그것이 그의 마음에 들지모른다.

편지를 가지런히 접은 다음 점례는 종이 한 장을 더 폈다. 비녀가 드러난 그녀의 옆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편지만 달랑 보내면 성의가 없다고 나무랄지 모른다.

연필을 잡은 점례는 거침없었다. 쓱쓱 힘차게 붓질을 하듯이 손을 놀리자 어느새 자신의 옆 모습을 완성할 수 있었다. 눈동자를 그릴 때는 조금 정성을 들였으나 나머지는 거칠은 상태로 그대로 두었다. 유지가 보고 평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 것이다.

그녀는 편지를 들고 일찍 집을 나섰다. 광통교 다리 아래까지 왔을 때 아침을 물린 부지런한 아낙들이 설거지나 빨래를 하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청계천은 아낙들의 다듬이 소리와 물방울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점례는 눈을 돌렸다. 다닥다닥 게딱지처럼 엉겨 붙은 초가집과 그 집들과는 달리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거로 엉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점례는 인사동에서 경성우체국까지 걸어갈 참이었다. 그녀는 간혹 마차나 전차를 타기도 했지만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보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조금 거리가 있지만 우편국까지 걸어가고 있다.

오가는 남루한 행인들의 모습과 잘 차려입고 뽐내며 걷는 신흥 부자들의 모습 역시 초가집과 기와집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결코 한데 어울릴 수 없는 존재였으나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었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우편국 앞에서 점례는 잠시 머뭇거렸다.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경성 우편국 건너편으로 미쓰코시백화점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그 사이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나가면서도 송구스러워했다. 자신의 발걸음이 행여 안에 있는 귀중한 물건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서둘러 위압적인 건물 앞을 지나쳐갔다.

그들을 시야에서 떠나보내자 대각선으로 조선은행이 보였다. 점례는 만주를 거쳐 경성역에서 마차를 타고 올 때 느꼈던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오자 몸을 잠깐 움츠렸다.

음산한 날씨가 몰려 올 때 느끼는 신경통 환자의 느낌 같은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당당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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