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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6:02 (금)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면 특선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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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면 특선도 가능할 것이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5.10 1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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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유지의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 유지의 따뜻한 품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숨소리와 체온이 그리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바르르 떨리는 편지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안았으나 감정이 격해 오자 그만 편지가 유지인 것처럼 꼭 껴안았다.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한다고 했지만 그걸 깜박 잊을 정도로 점례는 유지와 자신이 한 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상태 그대로 한동안 그녀는 그렇게 있었다.

‘네 품은 따뜻해.’

유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실제로 그런다는 듯이 목을 약간 움츠렸다. 그러자 유지는 그녀가 더 간질거리는 것을 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 마디 더했다.

‘가만히 있어. 그래 응 좋아.’

명령이라도 따르듯이 점례는 그 말에 복종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숨도 죽였고 그래서 가슴의 고동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감정이 가라앉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이제 그녀는 가슴의 편지를 손에 들고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런 것은 나중에 그에게 구겨진 것을 보여주면서 형편없는 종이에 쓴 편지를 책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리가 없다며 당황하는 그에게 숨기지 못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할 것이다.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이 이렇게 했어요.’

잠시 영문을 모르는 유지가 어떤 상황이냐고 말 대신 눈짓으로 묻는다. 그러면 점례는 부끄러워하면서 조금 전의 상황을 설명해 준다. 벌써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다.

점례는 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바람을 맞았다. 그렇게 그녀는 또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지나가는 행인이 올려다 봤다면 막 감은 머리를 말리는 행위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녀는 창문은 그대로 둔 채 작은 책상을 끌어당기고는 그 앞에 앉았다. 펜을 잡은 손이 빨리 무엇이라도 적고 싶다는 듯이 편지지 쪽으로 뻗었다.

그녀는 적기 전에 구겨진 편지를 바르게 펴고는 그것을 한쪽에 밀어 놓았다. 잡은 펜의 부드러운 느낌이 좋았다.

떠나올 때 유지가 그녀에게 가지고 가라고 한 서양식 만년필이었다. 잉크에 찍어 바르면서 그녀는 유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은 것을 느꼈다.

바람이 불어와도 그녀는 달뜬 상태였고 그것을 누르려고 그녀는 마구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고마운 삼촌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맨 앞에 적은 다음 그녀는 조만간 개인전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을 표시했다.

성과가 좋으면 대회에 출품하겠다는 뜻도 언뜻 비쳤다. 유지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된 그녀는 완성되지 않은 서투른 솜씨로 망신당하지는 않겠다는 각오 한마디도 적어 놓았다.

‘삼촌이 그러는데 괜찮대요. 겨뤄볼 만한 상대가 많지 않다는 군요.’

그녀는 이 말을 적어 놓고 몇 번을 고쳤다 다시 썼다를 반복했다.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표현이 찾으면 더 있을 듯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장 다음에는 한동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한 것이다.

유지의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뜻 전해 들은 전황에 따르면 유지의 편지글과는 달리 일본은 태평양의 여러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구축함이 파괴되고 전투기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삼촌은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듣고 오는지 간혹 혼잣말 비슷하게 힘든 전쟁이야, 힘들어 하고는 점례의 눈치를 살폈다.

점례는 전쟁에 관해서는 묻는 것을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눈으로 봤던 참혹한 경험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일본이 지면 어떻게 되는지 점례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일본이 질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

점례는 거기까지 자신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삼촌은 일본이 져도 조선에 남아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언제나 조선은 나의 제2 조국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내국에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일본도 조국이지만 조선 역시 그에게는 조국이었다. 그러니 전쟁의 결과에 상관없이 그녀는 삼촌에게 의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마 일본이 전쟁에서 지겠어? 하는 안도감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제로 졌을 경우는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을 한 다음 날 삼촌은 경시청에 갔다 온다면서 종일 화실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점례는 한동안 잊었던 전쟁에 대한 생각에 몸이 오그라들었다.

잊었던 것이 불쑥 나타나서는 손목을 잡아채서 다시 트럭에 구겨 넣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몸가짐을 더 챙겼고 그림에 열중했다. 실력은 날로 늘었다.

원근법 같은 것은 이제 식은죽 먹기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보이는 사물을 비틀어 현실과 꿈 속의 중간 어디쯤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창의력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쟁이 떠오를 때면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는 열의로 그것을 막아냈다. 그녀가 속한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그녀는 이제 알아주는 여류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다면 특선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세계의 화가’ 도판에 실린 명작의 기준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게 일었다. 그녀는 그림의 제목을 생각하는데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완성되지 않은 작품의 제목은 고상한 것이어야 했다. 누가 봐도 그림과 전혀 동떨어지지 않으면서 그것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다시말해 한 번 들으면 기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제목을 달아야 한다.

처음에 그녀는 ‘천황에 바치는 조선 청년의 붉은 피’ 같은 역사에 남을 극적인 제목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진부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애국 가요의 아류에 다름 아니었다. 모나리자 같은 외국식 이름은 좋았으나 후대에도 이어질 작품치고는 왠지 아니었다.

대상이 정밀하면 제목도 정밀해야 한다. 고개를 저으면서 그녀는 제목은 그림이 완성되면 정하자고 뒤로 밀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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