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5 18:17 (목)
종로 삼가에 점례가 도착했을 때는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상태바
종로 삼가에 점례가 도착했을 때는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5.02 1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눈을 감았다. 모든 잡념과 망상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그러나 점례는 눈을 뜨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경성의 모습을 봐야 한다. 지금 보는 것들은 모두 처음이다.

그러니 새겨야 한다. 이곳이 지금부터 내가 생존할 터전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점례는 넘쳐나는 호기심을 감당할 수 없었다.

벌써 군인들처럼 나란히 줄선 여자들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다. 그 시간은 길지 않고 짧았다. 그들과 연결된 끝도 느슨해졌다. 점례는 가뿐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경성역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도 마차는 이동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짧은 시간과 거리 사이에서 점례의 머리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빠르게 움직였고 결단했다.

마차는 저녁 시간과 맞물려 조금 지체되고 있었다. 막 도착한 전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정류장으로 몰려들었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만주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어서 점례는 이곳이 조선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맞다고 조선이 틀림없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점례는 그 생각을 더 오래 했을 것이다.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들과 검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한데 섞여서 있었다. 그들은 체면을 차리면 차를 타지 못한다고 여겼는지 차례를 기다리는 대신 문 쪽을 향해 개미떼처럼 뭉쳐 있었다.

그 와중에 갓이 비뚤어지고 옷고름이 틀어지기도 했다. 여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시간에 쫓겼다. 

마차가 움직였다. 커다란 기와 지붕을 인 남대문 사이로 짐 마차가 들어가고 있었다. 점례는 모든 풍경에 반응했다. 한 번 보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진풍경이라는 듯이 눈에 힘을 주어 마음에 담았다.

그러나 생소한 것이어서 보이는 것의 이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마차에 올라 타자 마자 점례는 마차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꼭 말해 달라는 부탁을 한 이유였다.

촌티를 내지 않으면서 지명과 건물을 익히기 위해 점례는 역마다 건물마다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다행히 마부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고 경성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그 일은 무엇보다 수월했다.

‘아씨 남대문 뒤에는 커다란 시장이 있는데 구경 가면 볼거리가 많아요.’

그는 남대문 시장을 보라고 고개를 돌려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경성부청에 닿기 전에는 왼편으로 덕수궁 건물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석조식 경성 부민관, 우편국 건물을 차례로 지났다.

‘여기서부터 종로입니다. 종각 건물 보이지요. 저기 종소리가 아름다워요.’

생각보다 날은 쉽게 저물지 않았다. 아직 거리는 사물의 식별을 뚜렷이 할 만큼 밝았고 어둡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와이엠씨에이 건물입니다.’

사람들이 들고 나는 곳을 가리킬 때는 저기가 그 유명한 화신백화점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마부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자신의 주특기를 살리고 있으니 마부는 신바람이 났다. 그럴 때마다 점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아, 그렇군요 라고 화답하면서 마부의 의욕을 복 돋았다.

그러면서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점례는 열심히 듣고 외웠다. 남대문, 남대문 시장, 덕수궁, 부민관, 경성부청, 종각, 와이엠씨에이 순서대로 외웠고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연결시켰다.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서양식 건물과 조선 한옥과 초가집 등이 섞여 있는 풍경은 막 지기 시작한 석양을 받아 그런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길게 일렬로 늘어선 전신주와 전선들이 얽기 설기 섞여 있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점례는 이것들을 스케치해보고 싶었다. 부끄럽다는 듯이 치맛자락에 감추었던 손을 꺼내 점례는 그리는 시늉을 해봤다. 사각의 도화지 위에 눈으로 구도를 잡았고 건물을 배치했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런 다음 그것을 머리에 넣었고 넣은 것을 복기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쓱쓱 그려낼 듯 싶었다. 그런 다음 삽화 위에 물감을 덧칠해 나가면 제법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마음에 점찍은 것을 따로 집어넣은 풍경도 구상해 놓았다. 그것은 유지가 늘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누구나 보는 것은 그릴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 화가만이 가질 수 있는 색다른 것이 더해져야 진정한 그림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점례는 늘 머리에 찍힌 것과 찍히지 않은 것을 함께 구상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 원칙이 지금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경성 우편국 앞을 지날 때 점례는 문득 그 생각을 했다.

우선 편지를 쓰고 남은 공백에 삽화를 곁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곱게 접어 유지에게 보내야 한다. 여기까지는 걸어오고 싶었다. 그래서 목적지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다.

'한 삼십 분 정도 걸려요. 물론 마차를 타면 10분이면 가고요.'

그 정도 거리라면 걷기에 좋았다. 주변을 익히고 길을 외우는 데는 걷는 것이 최고다.

그녀는 짧은 만주 체류 기간 동한 걸어서 보고 배운 거리를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온다. 걸으면서 볼 것이다. 느낌도 오겠지. 조선의 땅과 하늘과 가옥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미래도 그릴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한 억척스러움을 놓치 않을 것이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생의 활력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손에 꼭 쥔 편지를 보낸다. 심장이 뛴다. 그녀는 유지가 그립다.

그가 보고 기뻐해 주면 좋을 것이다. 잠시 피 묻은 손을 놓고 읽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 줄 것이다. 그 순간 날아온 총알은 그를 피하고 행운의 편지가 그를 살린다. 이제 유지의 목숨은 점례의 손에 달려 있다.

점례는 뛰는 심장을 가만히 두었다. 점례의 편지를 읽는 유지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생동쳤기 때문이다. 유지는 글씨보다 그림을 먼저 볼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틀림없다. 유지는 전쟁터에서 점례의 그림 솜씨를 칭찬했다.

하나를 가르키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라고 너는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했다.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될 거라는 말은 격려의 말이나 칭찬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평가였다.

그는 점례의 그림을 놓고 한 번도 비난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해보라고 코치는 했지만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비웃지 않았다.

점례는 유지의 따뜻한 손을 잡고 싶었다. 그의 모습, 웃음, 몸 그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세상의 어딘가에 그가 존재하고 있는 자체가 그녀가 지금 살아 있는 존재 이유였다. 자신을 돌봐줬고 구해줬고 살려서 조선 땅에 보내줬다.

그러나 점례는 유지의 주소를 갖고 있지 않다. 새로운 주소 말이다. 그 전의 주소는 삼촌의 주소를 외운 것처럼 머릿속에 있다. 그러나 점례가 떠나 온 후 일주일 후에 유지는 태평양의 어느 섬으로 자진해서 떠났다.

그는 안전한 후방 대신 전방을 원했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의 깊은 고뇌에 대해 점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주소가 찍힌 편지를 삼촌의 화실로 보내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점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두세 점의 삽화와 그 위에 칠한 물감의 색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조선총독부는 알지요.’

미쳐 소개하지 못한 것은 그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듯이 마부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지나쳤던 커다란 회색 건물 말입니다.'

그러면서 말머리를 돌리기 위해 오른손에 잡은 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종로 삼가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마차를 돌리면서도 마부는 입을 수지 않았다.

'저쪽 위로는 될 수 있으면 가지 마세요. 아가씨.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놈들이 잡아챌지 몰라요. 애국을 부르짖다가 몸을 망치지 말아요.'

그는 떠나가면서 조선놈들 중에 일본 앞잡이가 많으니 조심하라면서 마차의 고삐를 흔들었다. 그 소리에 점례가 멈칫했다. 잘못을 저질러 쫓기고 있지 않다는 안도감이 순간 일었다.

‘일주일 후면 창경원 벚꽃이 볼 만할 겁니다. 차라리 거길 가세요.’

글쎄 꽃이 지기전에 그곳에 갈 시간이 있을까. 꽃구경이라면 나쁠 게 없다. 점례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고향의 동휴가 일본 순사인 것을 기억해 내고는 혹시 저곳에 그가 근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마부에게 다음에 또 만나고 싶은 손님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에 넉넉하게 요금을 지불했다. 손에 들린 돈을 보면서 마부는 채찍은 놓지 않은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 수고의 대가치고는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마부가 떠나자 점례는 배가 고팠다. 가마솥을 밖에 걸고 해장국을 끓이는 주점에서 배부터 채워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발길은 화랑을 찾아 들었다.

삼촌을 먼저 만나야 한다. 어두워서 문을 닫기 전에 도착해야 일의 순서가 맞다. 그녀는 아무 화랑이나 찾아 들었다. 화랑 간판은 점례의 눈에 쉽게 띄었고 점례가 들어간 화랑 옆에도 다른 화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림 간판이 보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