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하루를 잤어. 이제 괜찮아.’
눈을 깜박이며 용희가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주변은 조용했다. 적막했다. 애초에 소리가 없는 것과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고요였다. 끔찍한 소음은 어디로 갔나.
‘이것이 가능한가. 꿈일 거야, 동화속 이야기겠지.’
소리가 사라진 곳에 냄새가 스며 들었다. 약하게나마 후각이 작동하고 있었다. 촛농이 떨어져 내릴 때 나는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 냄새를 용희는 기억하고 있다. 접골 아주머니가 춤을 출 때면 박자를 맞추듯이 촛불도 일렁였다. 눈물처럼 흘러 내리는 촛농에서는 싫지 않은 냄새가 났다.
바로 그 냄새였다. 익숙한 것에 용희는 용기를 냈다. 그 덕분인지 시각도 점차 돌아왔다. 용희는 눈에 힘을 주고 이물질을 빼내려는 듯 여러 번 깜박임을 계속했다.
그것 때문인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용희의 눈앞에 과연 작은 불빛이 일렁였다. 그것은 밤하늘의 은하수가 새벽녘에 잠을 자기 위해 떠나는 행위였다. 물체는 선명해 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나중에는 두 명이 그 다음에는 여러명이 등장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어 올랐다. 무대를 장악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춤을 추는 사람은 여러 명이 아닌 혼자였다. 착각이었다. 혼자서 이리저리 홀을 휘젓고 다녔다. 용희는 넋 놓고 그 모습을 응시했다. 누군가. 누가 저렇게 멋진 폼으로 춤을 추는가.
용희는 박수를 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 까지는 아직 허용되지 않았다. 마음은 여러번 박수를 쳤지만 지친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대는 사라졌다. 댄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음악은 계속 울리고 있다. 용희는 박수가 아닌 머리를 감싸쥐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직 명확한 것은 없었다. 용희가 어둡고 긴 터널의 끝을 통과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빛이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무르자 용희는 점차 안정을 찾았다. 지상의 어디에도 없는 안전한 곳을 발견한 기쁨에 몸은 들떠 올랐다. 그것은 살았다는 원초적인 안정감이었다.
마치 봄의 햇살이 푸른 들판을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그런 모습을 따라가면서 정신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타는 여름날의 갈라진 논처럼 세로의 줄이 여기저기 얽혀 있어 말을 하려고 입을 떼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물 좀 줘요.’
용희가 할 수 있는 간청의 말은 여기까지 였다. 그 말을 하고 나자 갈라진 입술에서 세 갈래로 피가 맺혔다.
‘나야, 용희야, 말수’
말수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부르면서 용희를 일으켜 안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말수의 눈에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아니라 살았다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는 자신이 이제야 철들고 있다고 느꼈다. 완전한 어른이 됐다고 여겼다. 툭 하면 욕설을 하고 침을 뱉던 노무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이제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것은 너무 늦게 왔다. 조금 일찍 왔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지금이라도 온 것이 다행이다. 안도감에 말수는 울컥했다. 그녀를 놔두고 혼자 산으로 도망친 것이 괴로웠다.
지금 그는 한 여자 앞에서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다. 느닷없이 그런 마음이 들었다. 걷잡을 수 없는 파도처럼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왔다.
마침 장소도 그러기에 적합한 예배당이다. 이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하나의 질긴 끈으로 묶여 있었다. 까만 밤의 어둠은 지나갈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월의 달콤함 뿐이다. 말수는 온기가 차오르는 용희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때 그녀는 작은 제단 앞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보았다. 왜 그가 나를 쳐다보는가. 용희는 살아 있는 예수가 자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살아 있는 진짜 예수였다. 성당 안에 가짜가 아닌 진짜 예수가 있었다. 예수는 엄청한 소란이 아닌 정적 속에서 왔다. 그가 여기서 부활했다. 못이 박힐 때 지었던 험상궂은 표정은 사라졌다.
그러나 용희는 자신은 구원할 힘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잘 차려입지도 않았다. 행색도 말이 아니다. 한마디로 이 광경을 즐길 상황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혼란 그 자체였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안간힘을 썼다. 머무를 자격이 그녀에게 없었다. 이곳은 주인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였다.
깨어나야 한다. 그래서 내민 손을 잡아야 한다. 용희는 안간힘을 썼다. 의식의 저편에서 조금 더 힘을 써보면 어떻게 될지 아느냐고 뒤를 밀었다. 그러나 미는 힘은 약했다.
그녀 스스로 바닥을 치고 있는 몸 상태를 끌어 올려야 한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었다. 벽을 집고 일어서려고 용을 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이 움직였다. 의아했다.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다니.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달라질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내가 그러지 못하는 것은 부러진 돛 때문이 아니다. 항해사는 필요 없다. 그 정도는 스스로 해낼 수 있다. 용희는 쓰러진 것을 어깨에 매고 무엇을 매달기에 좋을 만큼 똑바로 세웠다.
그 순간 용희는 정신의 돌아옴을 느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말수인 것도 알아차렸다. 말짱한 상태다. 이곳은 성당이고 안전하기도 하다.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리로 깨우칠 것도 없었다. 어둠이 더 깊은 곳으로 잡아끌지도 않았다. 도와달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듯이 애초 그대로의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말수를 미워했다가도 그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마음 때문에 용희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말수를 보고 맨 처음 마음이 움직여서 보인 행동은 눈물이었다.
눈물은 용서를 의미했다. 이제야 왔으냐는 타박이 아니었다. 고마움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 용희는 이제 그 어떤 것이 와서 마음을 흔들어도 중심을 잡을 것이다. 이것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모두 사실이었다. 말수도 진실이었고 용희도 진실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존재가 선명한 사람이 되자고 손가락을 걸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끝내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자도 막아낼 수 있었다.
용희는 위에 매달린 예수가 자신을 또다시 내려다보는 눈길과 마주했다. 이런 상황을 누구한테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두려웠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 다시 찾아왔다.
지금까지는 잘 막아냈으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이것이 동화 속이라면 꿈에서처럼 지나가겠지. 용희는 다시 정신 줄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