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뉴스]
어슬렁거리던 개 한 마리가 용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피 묻은 혀로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굶주림을 벗어난 개는 숨 쉬는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사람의 마음을 개는 알고 있었다. 실눈을 뜨고 용희는 살아있는 자신의 숨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 순간 말수도 바위 아래서 잠시 쉬었다.
방금 전의 상황을 알고 있던 터라 서두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는 빠르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느긋한 사람이 오래 살아남아서 전쟁을 기억했다. 말수는 기억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자 통영에서 뱃놀이 하던 버릇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윗옷을 위로 끌어 올려 배를 드러낸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마른 배를 슬쩍 치고 지나갔다. 땀 냄새가 뜨거운 열기에 섞여 훅하고 끼쳐 올라왔다.
동시에 마를 때 느끼는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싸고 돌았다. 말수는 이제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총알이든 폭탄이든 그 무엇이든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예 조금 눈을 붙이기로 했다. 간밤의 불야성은 잊어 버리자고 억지로 다짐했다. 금세 눈은 감겼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폭발음은 산을 흔들었다. 지축을 흔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 말수의 몸은 생기가 돌았다. 짧은 수면이 그에게 다시 삶의 의욕을 당겼다. 그때 바로 머리 위에서 굉음이 터졌다. 비행기가 맞았다. 일장기가 선명한 비행기 한 대가 꼬리에 연기를 물었다.
경험상으로 저 정도면 추락이 분명했다. 빙글빙글 돌다 급하게 떨어질 것이다. 말수는 그 지점을 눈으로 따라갔다. 산으로 향하던 비행기는 기수를 바다로 바꿨다.
아직은 계기판이 일부 작동하고 있었다. 조종사는 살아서 자기가 움직일수 있는 힘으로 비행기를 마지막까지 조종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군함 두 척이 섬 쪽으로 무수한 포를 발사해댔다. 비행기는 곧장 거기를 조준했다. 애초 목적지가 그곳이라는 듯이 배의 중앙부를 향해 급하게 떨어졌다.
비행기가 목표물에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군함은 화염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붉은 것과 검은 것이 섞여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장관이 따로 없었다. 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직접 겪어 본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열기로 뜨거운 갑판 위에서 붕대를 들고 뛰던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까.
그때처럼 똑같이 사이렌이 울리고 의사들이 분주하고 비명소리는 거친 파도를 압도했다. 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또 한 대의 비행기가 고사포에 맞고 비틀거렸다. 이번에도 일본기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말수는 그 광경을 마치 미술품 감상하듯이 바라 보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옆에 누구라도 있다면 같이 놀라야 하는지 아니면 그 모습에 감탄해야 하는지 알쏭달쏭했다.
조종사는 죽을 맛이지만 아래서 그것을 지켜보는 자는 일종의 연출되지 않은 극적인 순간을 즐길 권리가 있다. 전쟁에서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었다.
그것을 야만이라고 불러도 좋다. 야만인의 상태로 말수는 바지를 까고 그쪽을 향해 오줌을 누었다. 그리고 추어올릴 생각도 없이 추락하는 비행기의 궤적을 좇았다.
그 비행기 역시 곧장 연기가 피어오르는 군함으로 돌진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직접 보네.'
말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용사의 최후는 저래야 하는가.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비굴함은 저들에게 없었다. 포로가 돼서 조국을 배신하거나 구차한 삶을 살지 않는다. 어디서 저런 정신이 오는가. 의식을 완전히 사로 잡는 것이 무엇인지 말수는 그것이 궁금했다.
죽음 앞으로 달려가는 용기는 살기 위해 싸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침을 거칠게 뱉으며 말수는 씩씩거렸다. 그리고 용희에게 생각이 미치자 그대로 아래를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눈앞에 가깝게 보이는 거리는 말수의 발길을 재촉했다. 가는 길은 처참했다.
보도 블럭이 길을 가로막았고 부서진 잔해가 작은 동산을 만들었다. 성당도 파괴됐다. 십자가가 깨진 창문 사이로 삐죽 솟아 나왔다. 용희가 있다면 아마도 저 근방일 것이다.
신부님을 만나 간호사로 돕겠다고 그녀는 제의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성당 안에는 그녀가 오고 나서 부상병들로 북적였다. 최종 집결지인 것처럼 꽉 들어찬 병사들 사이로 홀로 누비는 그녀가 안쓰럽다.
말수는 팔뚝에 찬 십자가 완장을 위로 끌어 올렸다. 행여나 적이든 아군이든 보면 쏘지 말고 가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라는 의미였다.
쓰러진 시체에서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었다. 산 자들은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
말수는 코를 막고 종종 걸음을 치다다 개 한 마리가 서성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충분히 배부른 개는 말수를 보자 경계하기보다는 천천히 저쪽으로 몸을 피했다.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짖는 것도 먹는 것도 다 귀찮다는 듯이 배를 드러내고 벌렁 드러누웠다. 불룩한 배가 숨 쉴 때마다 위로 아래로 흔들렸다.
거대한 군함이 엄청난 파도에 이리저리 쓸리는 것처럼 위로 아래로 헐떡였다. 말수는 아직 개의 침이 남아 있는 용희의 뺨을 흔들었다.
‘용희야, 내다. 내가 왔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말수의 흔드는 손의 감촉을 느꼈다. 수통의 물을 얼굴에 조금 부었다. 그리고 손으로 마사지 하듯이 문질렀다. 말수의 손길이 지나간 자국은 땟국이 벗겨져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말수는 일단 부서진 잔해 쪽으로 그녀를 옮기기 위해 최단 거리가 어디인지 살폈다. 움직이는 동작은 위험했다. 그래서 빨리 가야 한다. 이것은 운명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는 성당의 부서진 구석으로 용희를 옮기는데 성공했다.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문틈으로 보였다. 말수는 일단 자신이 먼저 들어가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결심이 선 표정으로 용희를 깨웠다.
‘가자, 저기 들어가 있으면 괜찮다.’
무너진 건물 사이로 기적처럼 사람 하나 지나갈 통로가 생겼다. 그 통로 끝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지하실은 깊고 넓었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지하실에서 다시 올라온 말수는 출입문 쪽을 일부러 허무러 뜨렸다. 받친 벽돌을 빼면서 뒤로 물러났다.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이곳이라면 여러날 숨어 있기에 안성마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