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희는 의식의 끈을 놓았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버텨보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이대로 고꾸라 져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
의식은 저쪽으로 갔다. 그러다가 다시 이쪽으로 왔다. 정신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흐리멍덩한 시야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냈다.
오랜만에 보는 접골 아주머니였다. 작두를 탔던 그녀가 용희 앞에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 용희야, 사탕가져왔다고 손을 내밀었다.
늘 듣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아주머니는 아버지의 먼 친척이었다. 주변에서 용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정식 신내림을 받지 않았으나 그런 사람보다 낫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용희가 아프거나 집안에 우환이 들면 아주머니를 초대했다. 먼저 쌀 한 됫박을 가져가서 청하고 굿이 끝나면 얼마간 더 챙겨주었다.
그러면 그것에서 일부를 아주머니는 떼서 용희에게 무엇이든 사 먹으라고 용돈으로 주었다. 지금 그 아주머니가 용희 앞에서 웃고 있다. 그 뒤로 초가집이 보였다.
작은 마당이 있고 외양간에서 소가 울었다. 울음 소리에 맞춰 아주머니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머리를 빙빙돌렸다. 커다란 모자에 달린 방울이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덩실덩실 춤을 출 때는 더 큰 소리가 났다. 손에 든 채에도 방울이 있어 위아래서 울리는 땡그렁 거리는 소리가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땀과 방울 소리, 무언가 내지르는 소리가 오늘은 왠지 낯설었다.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용희는 꾹 참았다. 이것이 지나가야 용돈이 생겼다. 그런데 오늘 접골 아주머니는 그전과는 달랐다.
용희에게 우리 용희대신 저년 썩 나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네가 여기에 있을 곳이 못 된다고 했다. 귀신은 귀신끼리 살라고 호통을 쳤다. 평생 안 하던 욕을 듣자 용희는 파랗게 질렸다. 엄마는 그런 용희를 감싸 안았다.
울음이 터졌다. 무섭기도 했고 평소 믿었던 아주머니가 변심한 것에 대한 실망에 용희는 더 크게 울어 제겼다. 우리 용희는 어디 가고 저년이 있단 말인가.
용희는 방울 소리가 요란해질수록 욕 소리도 높아가는 것에 더는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밖은 더 무서웠다.
깜깜한 대지는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그믐날도 이러지는 않았다. 그녀는 신발을 찾는 것도 대문 앞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는 돌아섰다.
다시 굿이 열리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잡은 문고리는 열리지 않았다. 얼마나 세게 닫았는지 아무리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용희는 쓰러졌다.
그 위로 돌무더기의 팔이 따라왔다. 팔은 돌을 헤치고 나와 쓰러진 용희를 깨웠다. 여기 누워 있으면 죽어. 어서 일어나서 달려가. 용희는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기 보다는 누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하늘에 무수히 많이 별들이 낮은 곳에 걸려 있었다. 용희는 그날 이처럼 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려올 때 아주머니를 배웅했다.
인사해야지, 용희야. 엄마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었던 용희는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 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주머니는 용희에게 다가가 이걸로 과자 사 먹어, 우리 예쁜 용희야.
용희는 아주머니가 보고 싶었다.
욕을 해도 좋고 매로 때려도 좋았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못 받을 것이 없었다. 말수가 가자면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겠다. 더는 이 꼴을 보기 싫고 붕대도 소독약도 항생제나 주사도 지긋지긋했다.
산속 깊은 동굴에 들어가 하루고 이틀이고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싶었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용희는 그 생각 하나에 몰두했다. 그러나 한 번 일기 시작한 감정의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방울 소리가 듣고 싶다. 그 소리라면 잊을 수 있다. 그러자 정말 종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종소리는 몇 번 울이다 말고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건물의 잔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였고 부서진 탱크 안에서 울부짖는 소리였다.
그중에서 돌무더기 속에서 지르던 소리가 가장 크고 날카로웠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손과 함께 몸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온 손은 이쪽으로 오라고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