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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절과 성당의 중간쯤에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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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절과 성당의 중간쯤에 와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19 0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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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다시 잠과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용희는 알다가도 모를 일에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금방이라도 절멸할 것 같은 기세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푹 꺾여 버렸다.

기세좋게 쏟아지던 소나기가 멈추자 하늘의 구름이 사라졌다. 숨어있던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대기는 용광로 속처럼 절절 끓어 올랐다.

온도는 급상승하고 있다. 축축하던 것이 일시에 말라버렸다. 이곳의 날씨는 전쟁을 닮았다. 아니다. 어찌 이같은 날에 전쟁을 꺼낼 수 있는가.

대기는 화창했다. 사이판의 날씨 중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인가. 거기다 바람까지 불고 있다. 너무 세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고 적당하다. 전쟁도 이처럼 적당했으면 좋겠다. 왜 전쟁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지 못하고 수렁에 빠지고 마는걸까.

시작했으면 맺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꼭 확실할 필요는 없다. 너무 길게 늘어지는 것이 문제다. 나무 그늘에 개들이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다. 저곳이라면 쉬어도 좋을 만한 장소이다.

검은 개가 하얀 배를 드러내고 여유를 부리자 용희는 말수는 안녕한지 걱정이 됐다.

자신을 추스르면 말수가 그랬던 것처럼 용희도 말수를 신경썼다. 거칠고 드세고 고집불통인 그가 그립다. 때로는 채로 까불어서 내쫓아야 할 사람이었으나 그가 없었다면.

용희는 몸소리 쳤다. 당장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고통에 몸이 쪼그라들었다. 그가 없었다면. 그러자 무작정 그를 따랐더라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해야했다. 용희는 뒤늦은 후회로 자책했다.

세상에 완전히 혼자가 될 때 느끼는 절대 고독이 찾아왔다. 처음 남양군도에 끌려왔을 때 그리고 말수를 만나기 전까지 겪었던 그 순간의 아픔이 다시 도져왔다.

용희는 자신이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느꼈다. 신을 찾을 만큼 정신의 절대 고양 앞에서 용희는 작아지고 있었다. 그의 도움을 생각했다면 그가 하자는대로 했어야 옳았다.

막사의 음침한 구석에서 자신을 구해준 말수를 배신하는 행위에 신도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라고 너는 말수를 배신할 수 없다고 자꾸 고개를 저으면서 부정했다.

생명을 향한 그의 처절한 노력, 살아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놀라운 정신력에 의지했어야 마땅하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용희는 그의 길이 과연 살 수 있는 길인지 의심이 들었다. 때로는 신의 말씀도 부정할 때가 있다. 

거기나 여기나 이 작은 섬은 숨을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바른길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때로는 사악하고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욕하는 사람이 제대로 판단을 내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없다고 그래야만 했는가.

그가 흘린 피를 떠올리면 그래서는 안 된다. 용희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모든 것은 혼란 그 자체였다. 다시 종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깊은 숲속 무량사의 절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키가 작고 다부진 스님이 위에서 내려온 두 줄을 한 손에 하나씩 잡고 있다. 종과 정면에 서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서 줄을 뒤로 잡아당겼다가 어느 순간 힘을 주어 앞으로 밀었다.

수평으로 선 아름드리 통나무가 앞으로 나가 부드러운 용의 몸통을 가볍게 쳐냈다. 그것은 성당의 종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처음엔 크고 강했으나 나중에는 여리게 여운을 남겼다.

연달아 땡땡땡 치지 않고 기다렸다가, 소리가 다 죽었다 싶으면 다시 스님은 두 손을 이용해 나무를 뒤로 밀었다 앞으로 당겼다. 그 의식은 마치 장례를 집전하는 신부처럼 엄숙했다.

하나의 의식은 이처럼 소중했다. 이 상태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절마당에 앉아 들려오는 아늑한 종소리를 들을 때처럼 편안한 정신을 유지하고 싶다. 그 때 몸은 또 얼마나 안정적이었던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환하게 피어났던 웃음의 의미를 용희는 이제야 조금은 이해했다.

종소리가 끝나면 용희는 절 마당을 뛰었다. 스님의 빗자루를 피해 삼층석탑 주위를 돌기도 했고 대웅전을 건넜다가 다시 탑 앞에 서기도 했다. 사람들처럼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흉내를 냈다.

엄마, 그래 그 모습은 엄마였다. 엄마는 간혹 절을 찾았다. 보자기에 쌀 한 됫박을 담아서, 어떤 날은 초를 세 개 사서 엄마는 용희의 손을 잡고 절에 가자고 재촉했다.

오늘은 절에 가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모는 성당에 갔다가 절에 갔다가 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엄마는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용희에게 하는 소리였다. 너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이모는 그런 엄마가 못마땅했으나 달리 어쩌지 못했다. 용희는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갔다. 엄마처럼 절에만 오지 않고 이모처럼 성당만 가지 않았다.

누가 손을 내밀면 거절하지 않았다. 거기도 좋고 여기도 좋았다. 집보다 넓고 뛰어다닐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생김새가 다르고 하는 말이 다르고 다른 표정의 얼굴을 구경하면 기분이 좋았다.

용희는 지금, 절과 성당의 중간쯤에 서 있었다. 감정의 동요를 가라앉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하나의 소리였을 뿐인데 종소리 하나로 용희는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종소리가 비명소리로 바뀌는데는 빨랐다. 건물의 잔해 속에서 들여오는 소리였다. 서너 명이 돌무더기 밖으로 손을 내밀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들에게 발을 옮겼다. 그리고 내민 손을 잡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래로 처진 손은 곧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다른 손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손은 팔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어깨와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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