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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은 그렇게 길고 긴 성지순례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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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은 그렇게 길고 긴 성지순례의 길을 떠났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16 0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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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곳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말수는 허탈했다.

차라리 물새는 군함이 더 안전했다. 그곳으로 돌아 갈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목적한 것을 이루기는커녕 시작도 안했는데 해도 너무했다.

다른 일을 모두 잊을 만큼 죽음이 코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애초 목적한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는 혼돈이었다.

말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큰 일이란 큰 일은 다 겪은 그 였으나 새로운 일 앞에서는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러나 총알 앞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었다. 마음은 그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래도 대책이 안 선다. 우왕좌왕 해도 마찬가지다. 어쩌란 말인가. 모든 것은 운명에 맞겨졌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랬듯이 이 순간의 생도 그렇게 결정된다. 그래 이것은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기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축제의 장을 즐기자. 폭탄은 세상을 어지럽히는데 자신이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세우는데도 일등 공신이었다.

환호와 행복만이 넘쳐 흐른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낮보다 밝은 조명탄은 갖은 모양으로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다. 야광탄의 긴 꼬리는 생명선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은 다시 잔잔한 수평선과 같아졌다.

조금의 틈이 생기자 말수는 손을 펴고 손금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생명선이 길게 쭉 뻗어 나갔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물이 흐를 정도로 깊은 고랑을 파였는지 눌러 보았다.

그러나 금같은 것은 없었다. 일시적으로 어둠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저녁에 어둠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화력이 잠시 멈춘 것이다. 산의 중턱에서 말수는 거친 호흡이 가라앉자 다시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는 덜 안전하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 한다. 이 넓고 높은 산에서 자신의 몸 하나 숨길 곳이 없겠는가. 하다못해 토끼굴이라고 좋다.

포탄을 막아주고 총알을 피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이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줄줄 흘러 내리는 땀을 닦을 시늉도 없이 말수는 더 좋다고 여겨지는 곳을 향해 위로 올라갔다.

천국은 낮은 곳이 아닌 높에 곳에 있는 것처럼. 용희는 그곳에 갔을까. 아직 이승에서 피를 닦으며 끊어지는 누군가의 삶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까.

자신의 손을 뿌리친 용희는 살아서 숨을 쉬고 있을까. 아물지 못한 상처에 더 큰 상처를 입고 부상병처럼 살려 달라고 신을 찾을까. 마지막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면서 엄마를 외칠까.

아니면 벌써 그 말을 하고 생을 마감한지 여러 시간이 지났을 수도 있다. 말수는 용희와 함께 하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끝가지 책임져야 하는데 비겁했다.

그러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말수의 말이 맞았다. 누구도 그녀가 결심한 것을 되돌려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말수의 책임이 아니다.

‘남아 있겠어요. 아직은 할 일이 있어요.’

그녀는 단호했다. 엄마를 애타게 찾는 세 살 아이를 두고 혼자 살기 위해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쓰러진 병사들은 모두 자식이었다. 엄마 젖을 떼지 않은 핏덩어리였다.

이마에 피도 안마른 것을 두고 모른체 등을 돌릴수는 없었다. 젖달라고 울고 보채는 자식을 두고 떠나는 엄마는 없다. 어디서 그런 결단이 나왔는지 용희는 자신도 놀랐다. 놀라면서도 그저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려다보는 일그러진 얼굴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갓난 아이가 아니었다. 이마의 피는 마른지 십수년이 지났다. 그리고 공유해야 할 기억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억지로 찾으려고 해도 소용없다. 아니다. 모든 것이 서로 얽혀있다.

그들은 내 자식이다. 총성이 잠시 멈췄다. 총알도 휴식이 필요한 모양이다.

한바탕 소동도 끝났다. 누군가에게는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다. 부상병들은 자신의 처지가 더 딱해 누구를 챙겨줄 형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상처가 크고 더 깊었다.

용희가 웅크린 몸을 바로 세웠다. 간호사 복장을 입고 태어난 그녀 용희. 그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분주히 움직였다. 밤의 어둠이 지나고 낮의 온기가 밀려들었다.

평온은 길었다. 휴전이라도 맺은 걸까. 대충 일을 마친 용희는 피의 냄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채 다시 엎드렸다. 방금 전 죽은 부상병의 팔이 그녀의 몸에 닿았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힘도 사라진 용희는 그 자리를 사수했다. 그녀는 이제 삶과 죽음을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방은 고요가 차지했다. 총소리 대신 종소리가 울렸다. 성당의 종소리. 어디서 들었더라. 저 종소리를. 용희는 기억해 내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어디서 들었던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마음의 안식만 얻으면 됐다.

십자가는 변함없었다. 세상 어디서고 같은 모양이었다. 그걸 보는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부서진 건물은 그대로 두고 아침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신자가 있는가. 용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원주민 서너명과 노인 두 셋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깊게 고개를 숙인채 아멘을 외치고 있었다. 신부님도 보였다.

무엇을 주제로 신부님이 설교할지 궁금했다. 조용히 자리에 앉은 용희는 탁자 사이에 가지런히 놓인 성경책에 손을 얹었다. 작은 묵주는 다른 손으로 잡고 가만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신부님 말씀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형식적인 설교였을까.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신부님은 그 말을 하기도 벅찼는지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기침을 서너 번 해댔다. 멀리서도 손에 묻은 피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총알에 맞았는가. 객혈의 결과인가.

많이 아픈 그는 자신이 이 자리에서 서 있을 날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도 마지막을 조용히 정리하고 싶을 거다. 신도에게 하는 설교가 아닌 자신에게 들려줄 그 무엇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

어디서 왔을까. 노랑머리 선교사는 이국 땅에서 이교도를 전도하기 위해 왔다가 전쟁 앞에 무력했다. 어쩌면 오늘의 이 자리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그는 습관처럼 하느님 아버지, 아멘을 끝으로 예배를 마쳤다. 원주민과 노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곳이 있는가.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그들의 거처가 있는지 궁금했다.

아직 파괴 되는 않은 성당 뒤편에는 부서지고 깨진 집 사이로 온전한 곳이 있었고 나간 그들은 그곳을 찾아 움직였다. 마치 시체가 움직이듯이 그들은 느릿느릿 걸었다.

용희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가고 싶지 않았다. 나가도 갈 곳이 없었다. 그들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곳이나 성경책을 펼쳐 들고 주님의 말씀을 찾았다.

읽고 또 읽으면서 기적이 사이판의 바다에 가득 펼쳐지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우스운 기도였다. 그러나 그것말고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죄는 마치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용희는 안간힘을 짜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했다. 그때 어깨에 어떤 감촉이 느껴졌다. 하느님이 강림하시어 간절한 용희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용희는 그대로 있었다. 못 느낀 것처럼 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신경을 어깨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앙상한 다섯 손가락의 위치를 감지했다. 하느님의 손길은 이처럼 가냘펐다.

마주친 신부님의 눈은 이승과 벌써 작별을 나눈 상태였다. 초점 없이 흐릿한 것이 죽음의 천사를 만나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어 용희에게 축복을 말씀을 내렸다.

‘신부님 고해성사를 해도 될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 같아서는 여러번 저으면서 완강한 거절 의사를 표하고 싶었으나 한 번 젓는 것도 힘에 겨웠다.

‘그럴 시간이 나에겐 없어요.’

신부는 그 말을 하고는 말하는 것도 힘에 겨운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는 느린 걸음으로 성모상 앞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려 오른쪽으로 걸었다. 늘 하던 익숙한 방법이었다.

돌아가지 않고 지름길을 택한 것은 한 발자국이라도 걷는 길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한줄기 햇빛이 성당안으로 비쳐 들었다. 빛은 일직선으로 성당의 깊은 안쪽으로 뻗어 나갔다.

신부님은 성모상을 끌어 안지 못하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몇 발자국을 아꼈어도 그렇게 됐다. 도중에 그만두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부님도 전화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신통한 재주가 없으면 재명을 살 수 없는 세상이었다.

신부님은 그렇게 길고 긴 성지순례의 길을 떠났다. 신자가 아닌 사람도 그 명성 때문에 만나고 싶어 했던 신부는 소임을 다 마쳤을까. 이익을 챙기는데 남보다 뒤졌던 어진 신부는 높은 수준의 최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쓰러지는 것도 평범했고 쓰러지고 나서 숨을 거두는 과정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남과 다른 것은 자신이 죽는 순간을 정확히 알았다는 것 뿐이었다.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종 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신부는 아니다. 바닥에 쓰러진 신부가 종을 칠 리가 없다. 용희는 새로운 호기심으로 잠시 기도를 잊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은 종소리가 아니었다. 폭발음이었다. 교전이 다시 시작됐다. 아침밥을 먹은 군인들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성당안에 울려 퍼졌다.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자의 지휘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서정성이 넘쳐났다. 쾅쾅쾅 이것은 큰 북이 울리는 소리였다. 바이올린의 음이 높아진 것은 따발총이 연달아 발사됐기 때문이다. 기관총이 탄피를 쏟아낸 것은 피아노 연주가 절정에 달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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