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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틈타 보트는 해안선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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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틈타 보트는 해안선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14 0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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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일본 군함이 은밀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밤이었다. 이곳 태평양의 비는 한 번 오기 시작하면 몇 날이고 무섭게 내렸다. 갑판 위에서는 그 비의 위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뿌연 안개 속에서 바람에 섞여 이리저리 날리면 깊은 산의 폭포수 아래에 있는 느낌이었다. 옷이 흠뻑 젖는 것은 물론 몸에서도 하늘의 비가 내려오듯이 그렇게 땅으로 흘러내렸다.

말수는 갑판아래서 갑판 위의 상황을 짐작했다. 병사들의 일부는 이 비를 고스란히 맞을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젖어 생쥐꼴을 하면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부지런히 대포를 닦고 총기를 소지하고 탄약을 안전한 곳에 이동시키기기 남은 마지막 힘을 쓰고 있다. 잠은 쏟아지고 악천후는 지속되고 이래저래 어려운 처지다.

서로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밤의 산길에서 갑자기 만난 짐승을 연상했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 섰다가도 식은땀이 가시면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군인의 신분임을 자각했다.

함장은 결단을 내렸다.

미군의 공습이 아무리 강하고 무서워도 무작정 만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가서 싸워야 한다. 숨어 있으면 적도 우리를 찾지 못하지만 우리도 적을 찾을 수 없다.

본국에서는 승리의 전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함장은 주변에 있는 다른 군함과 연결을 시도했다. 어렵게 무전이 연결됐다.

함장은 결단했고 명령을 받은 세 척의 군함은 따로 놀지 않고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지금 막만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말수는 움직이는 함정의 속도를 느꼈다. 굉음이 울렸다. 엔진 출력은 최대한 높였다.

군함이 속도를 낼수록 말수는 일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안절부절했다. 필리핀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러면 애초 계획은 틀어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직 용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필리핀이 아니면 다른 섬의 어떤 곳이 될 것이다. 직감적으로 말수는 그곳이 사이판이라는 생각을 했다.

떠나올 때 지휘관은 사이판의 전투가 이 전쟁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곳에 미군이 비행장을 건설할 경우 한 번의 비행으로 본토 타격이 가능하다고 했다.

전략적 요충지로 일본이 절대 절명의 순간까지 방어를 해야 하는 곳으로 사이판을 찍었었다. 그렇다면 이 군함은 사이판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한 후방 지원병력일지 몰랐다.

계획이 틀어지면서 말수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용희에게는 이야기 해도 될 것이다. 그녀가 어떤 묘책을 내놓을 수도 있다.

어차피 잠을 자기는 글렀다. 이야기를 들은 용희는 그 섬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물렀다.

‘필리핀 만 한가요.’

말수는 웃었다.

‘그곳에 비하면 손바닥이다.’

‘그러면 우리가 숨을 곳은요.’

‘그게 내가 걱정하는 바야.’

둘은 섬의 크기 때문에 그들의 도주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걱정은 상륙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결정한다 해도 무엇이 도움이 될 지 알 수 없었다. 

말수는 몸을 뒤척였다. 얼핏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엄청한 굉음에 순간적으로 말수는 몸을 웅크렸다. 의식에 따른 행동이라기보다는 본능이었다. 운동장 보다 큰 군함이 흔들렸다.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면 이런 기분일까. 말수는 군함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직감했다. 광산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서 막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곳의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말수는 사이판에 상륙하기도 전에 군함이 침몰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몸을 떨었다. 보복 공격이 시작됐는지 이쪽에서 쏘는 포가 둔중하게 갑판을 흔들었다.

그 다음은 아비규환의 연속이었다. 부상병들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지르는 소리는 연속된 폭발음에 묻혀 버렸다. 부상병들이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기 때문에 조용했던 것이 아니다.

말수는 용희를 흔들었다. 정신이 반쯤 나가 어리벙벙한 용희가 반응했다.

‘나가자. 부상병들이 우릴 찾는다.’

갑판 위는 피투성이 천지였다. 그들을 치료하는 말수나 용희도 그들처럼 똑같이 피를 온몸에 바르고 있었다. 부상병의 숫자는 셀 수 없었다. 그들은 공격이 시작되자 용감하게 앞으로 나갔다.

빈 포신을 채우기 위해 분주한 병사들은 죽은자를 밟고 다녔다. 부러진 부상병의 다리를 밟아 아예 못쓰게 만들었다. 그들 중 일부는 발빠르게 움직였으나 새로운 폭탄이 갑판위로 떨어질 때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이것은 부상자의 탓이 아니다. 종종걸음으로 그들이 움직이는 것보다 떨어지는 쇠뭉치가 더 빨랐을 뿐이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있다. 그것이 눈에 보였다. 폭발음에 앞서 빠르게 대각선으로 낙하했다. 어떤 것은 눈보라처럼 날리기도했다. 사람을 죽이고도 그것들은 당당했다.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파고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적들은 악마였다. 쓰러진 일본군은 그에 맞서는 천사였다. 흘리는 피와 고통에 울부짓은 괴성은 그것을 증명했다. 공격자는 또 야만인이었다. 그들에게 온정은 없었다. 그러나 이곳 군함은 힘이 없다. 반격할 기운이 다했다.

군함은 다시 만 깊숙한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출격했던 전투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무자비한 적은 꽁무니에도 함포 사격을 가했다. 군함의 모든 사람이 당할 판이었다. 어떤 병사는 허공으로 붕 떴다가 몸통과 팔 다리가 따로 따로 떨어졌다.

이제부터는 누가 누구를 도울 형편이 못됐다. 상처를 싸맬 붕대도 떨어졌다. 진통제나 항생제를 담아두는 약통은 텅 비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파편은 멈추지 않았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말수는 몸이 말을 듣지 않자 화를 내는 대신 용희에게 소리쳤다.

‘용희야 엎드려. 그래야 산다.’

용희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군함은 마지막 힘을 쓴 결과 적의 레이다에서 사라졌다.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긴 것이다. 다행히 말수와 용희는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정신을 차린 말수는 함장에게 의약품이 바닥났다고 말했다.

상처를 묶을 붕대가 없다고 이제 자신은 할 일이 없으니 총을 달라고 했다. 함장은 그런 말수를 상관의 눈으로 지긋이 쳐다봤다. 의사들도 군인만큼 위험에 처해있고 애국하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말했다.

‘보트를 주겠다. 내일 새벽 사이판에 상륙해라. 보급부대를 만나 부상병 치료용으로 의약품과 필요한 것을 챙겨와라.’

함장은 말수의 헌신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하선을 승낙했다. 총대신 수술칼이 의사에게 아직은 필요하다고 함장은 판단했다.

죽기전까지 총을 잡을 수 있고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 손가락만 있다면 부상병들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가 필요하다. 의약품과 붕대는 필수품이다.

팔과 다리에 파편을 맞은 용희도 하선자 명단에 올랐다. 섬에 내려 그곳에서 간단한 치료를 하고 군함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말수와 용희는 이번에도 떨어지지 않고 기적적인 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어둠을 틈타 보트는 해안선에 상륙했다. 예를 갖춰 마중 나오는 인사는 없었다. 안내를 맡은 하사관 두 명은 그들을 안전막사까지 안내하는데 성공했다.

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해안선에서 이곳까지 오는 중에도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에는 아군도 있었지만 적군도 있었다. 그들은 섬을 지키고 섬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렸다.

이곳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포소리와 총소리가 되레 갑판위보다 더 사나웠다. 갑자기 막사 벽에 총알이 박히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깨졌다. 그것을 신호로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돌격 앞으로를 명령했다.

막사안의 병사들은 지휘관을 따라 모두 밖으로 뛰쳐 나갔다. 말수와 용희는 엉겁결에 둘 만이 남게됐다. 이것은 기회였다. 말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여기 남는 것은 자살행위다. 말수는 막사에 남은 총 한 자루를 쥐고 용희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일단 산으로 가자. 그리고 굴 속에 숨자. 상황이 파악되면 그 때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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