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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화실을 운영하는 삼촌가게에 있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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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화실을 운영하는 삼촌가게에 있는다고 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12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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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그림자 셋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의 달은 구름에 가렸고 별은 높은 곳에서 흐릿했다. 제지하는 사람도 뒤 따라는 오는 사람도 없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는 듯이 가뿐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머뭇거렸다. 애초 장소는 변경됐다. 조선 청년은 괜찮다고 했으나 휴의는 못 미더웠다.

그가 알려준 주소는 휴의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이었다. 부대장이 돌아오면 일 순위로 습격할 장소였다. 청년의 아지트는 일본군에게 노출됐다.

휴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곳이 일본군 손안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어서 벗어나야 한다는 초조한 눈빛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휴의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추격대는 그곳을 급습했다. 그는 청년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지체하지 말고 떠나자는 의미였다. 허비할 시간이 한시도 없었다.

셋은 이번에는 그림자를 등뒤에 두고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내달렸다. 달리는 뒤로 청년의 근거지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휴의도 이곳을 안다. 늘 다녔던 길이다.

익숙한 길이 낯설었다. 쫓던 것과 쫒기는 것이 달랐다. 추격자에서 신분이 바뀐 휴의는 도망자가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등 뒤가 따끔거렸고 총알이 뚫고 앞으로 나갈 것만 같았다. 근거지를 한참 벗어났는데도 휴의는 더 북쪽으로 가자며 쉬기를 포기했다.

아까보다 더 빨리 움직이자 부하 하나가 뒤에 처졌다. 멀리서 사냥개의 짖는 소리를 휴의는 들었다. 조만간 총소리가 따라 올 것이다. 누가 일선에 서고 있는지 휴의는 그 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자비한 얼굴이 일그러지고 쌍욕을 뱉는 그 녀석을 휴의는 평소에도 못마땅했다. 다가오면 죽여버려야지, 휴의는 이를 악물었다. 조선인 토벌대는 이제 독립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첫 전과는 그 녀석의 죽음이 될 것이다. 휴의는 득의만만했다. 그에게 더 이상 독립군 토벌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휴의의 배신은 부대장에게 충격을 줬다. 자신이 없는 틈을 노린 그의 계획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더 분노가 치솟았다. 우발적이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지만.

부대장은 마치 자신 때문에 일이 그르쳤다며 자책했다. 더구나 체포된 끄나풀과 함께 도주한 것은 일본군의 수치였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동족의 배신 앞에 그는 갈가리 찢기는 심장의 고통을 느꼈다.일본인 앞에서 당당하게 토벌대의 전과를 올렸던 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받았다.

더 허물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기 전에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사령부가 알기 전에 일을 끝내고 싶었던 부대장은 가용 인원을 총동원해 휴의 일당의 뒤를 쫒았다. 수색견을 앞세우고 민가를 급습했다. 사전에 알아둔 청년의 아지트는 두세 겹으로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방에는 이불 가지와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청년의 살림은 단출했다. 언제든 두고 떠나도 상관없을 만한 물건만 남아있었다. 한마디로 가져갈 것이 없는 홀가분한 방이었다. 추격의 단초를 찾을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휴의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추격대는 러시아 국경 은근에서 도주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국경을 넘어서면 일이 꼬이게 된다. 그들은 국경 수비대와 무전으로 연락하면서 휴의 일당을 구석으로 몰았다.

셋은 맞대응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휴의의 부하 하나가 심장을 관통당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즉사했다. 부상 정도를 살피려던 조선 청년은 다리에 총알을 맞았다. 그가 맞은 곳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또 다른 총알이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다.

휴의는 그를 끌고 간신히 언덕 뒤로 숨었다. 사방에서 총알이 땅에 박히는 소리가 둔중하게 들렸다. 청년은 이생은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손에 든 새가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에 후회는 없는가. 그는 죽기 일보 직전에 가슴속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휴의가 도와줬다.

‘고향 사람 만나서 반가웠소. 엄마 만나면 아들은 잘 있다고 전해주시오.’

마지막까지 남아있지 못한 자책감을 가득 담았던 두 눈이 빛을 잃었다. 수첩은 손바닥에 담길 만큼 작았다. 휴의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무작정 앞을 보고 달렸다.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그곳을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그리고 산 쪽으로 급하게 몸을 몰았다. 말 위에서 채찍을 들고 내리치는 것처럼 자신을 닦달했다.

달리기라면 해볼 만하다. 더구나 산은 익숙했다. 고향의 산과 이곳의 오르막 산이 다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달리기 시합에 나선 경주선수처럼 지치지 않고 산을 넘었다.

그리고 또 다른 마을을 지났다. 그러자 인파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집도 건물도 사람도 제법 도시다운 움직임이 활발했다. 그는 멈추고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주변에 불이 하나 둘씩 들어왔다. 또다시 저녁이다. 거의 하루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달렸다. 아무 곳에서나 들어가 눕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감기는 두 눈을 억지로 뜨면서 깔끔한 곳을 찾았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독립군 토벌대는 자금이 달리는 독립군이 허름한 곳에서 주로 묵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싸구려 여인숙이 주로 검문 대상에 들었다. 휴의는 그 와중에도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했다.

여관 주인의 안내를 받고 방에 들어선 휴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휴의는 잔혹했다. 부러진 팔을 비틀었고 깨진 얼굴에 소금을 뿌렸다. 두 눈을 파내려는 듯 손가락으로 위협했고 귀에 달군 인두를 들이댔다.

당하는 자도 치를 떨었고 불에 손을 쥔 휴의도 마찬가지로 떨었다. 떨리는 손을 흔들며 그는 또 한 명의 독립군을 고문하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갔다.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발로 걷어 찼다. 걸지걱 거리는 것을 치운다는 심사였다. 말이 필요 없었다. 기세로 눌러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 그러다 휴의는 어느 순간 노인과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일그러진 얼굴로 휴의는 불렀다.

‘휴의야, 내다 아부지다.’

아버지가 소리쳤다. 휴의는 눈을 번쩍 떴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누운 상태로 천장을 바라봤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그렇게 더 있었다. 악몽이었다.

도주 뒤에 하룻밤 묵은 곳에서 그는 노인을 고문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독립군 토벌대였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미친 정신은 곧 돌아왔다.

어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하루 동안의 복기는 10분이면 충분했다. 이곳은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어떻게 국경을 넘어왔는지 기적의 연속이었다. 이제 조금은 안심이다.

상황파악을 마친 그는 언뜻 청년이 죽으면서 건넨 수첩 생각에 그것을 펴보았다. 서툰 조선어와 일본어가 섞여 있었다.

고향 주소와 아버지 어머니 이름 그리고 점례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점례라니. 그 점례인가. 휴의는 눈을 의심했다.

점례라는 조선 처녀를 만났다. 만주에서 그림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녀는 기차 안에서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해주었다. 그녀는 일본군 고급 장교가 준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힘을 발휘했다.

그녀는 이곳 일이 마무리돼 경성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휴의는 거기까지 읽다가 아래로 눈을 돌려 1937년 8월 3일이라는 날짜를 확인했다. 세 달 전 일기였다.

다시 위로 올라가 일기의 중간 부분을 읽었다. 경성에 가면 그녀를 찾아볼 생각이다. 종로에서 화실을 운영하는 삼촌 가게에서 당분간 있는다고 했다.

가게 이름은 잊었지만 수소문하면 어렵지 않게 행방을 찾을 것이다. 그녀는 나와 삼 일간 같이 있었다. 그 시간은 내 전생에 비해 결코 짧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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