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늦은 벚꽃이 의자 위에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다
상태바
늦은 벚꽃이 의자 위에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11 15: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약뉴스]

'나는 조선사람이오.'

'나도 그렇소.'

'내 나이 젊소.'

'나도 그렇소.'

청년의 말에 휴의가 따라하는 꼴이 되고 있었다. 그것은 장난이 아니라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상대를 무안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청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청년은 몇 마디 말에 말이 입에서 걸리지 않고 밖으로 나오는 것을 느끼고 아까보다 좀 더 자신있게 말했다. 말의 기억을 잃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휴의는 그가 긴 말을 할 동안 말을 끊지 않기 위해 가급적 대답대신 그의 말을 인내하면서 들었다.

‘이곳은 독립운동 하기에 최적지요. 여기서 나는 내 안에 가득찬 독립의 의지를 느끼고 있소. 선혈들의 기운이 내게로 오고 있소. 몸의 기름이 펄펄 끓어 오른다오, 당신은 그것을 못느끼오.’

청년은 그 말을 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이렇게 긴 말을 해도 되는지 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입술에 침을 묻혔다.

그가 한 말을 조금 요약해 보자.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나라를 잃었으면 되찾기 위한 운동을 하는 것은 망국인의 당연한 권리요 의무라고 했다.

그 다음부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한 참 동안 이어졌다. 휴의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듯이 다 좋은데 살고 나서야 독립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표정은 평화롭고 억양은 부드러웠다. 마치 선생이 아끼는 제자에게 대화술을 가르키는 모양새였다.

청년은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당신이 체포해서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내버려 뒀으면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에게 당했으면 덜 억울했을 거라는 말도 했다.

‘부모님은 이 일을 아시오.’

‘모르지요.’

‘안다면 찬성했을까요.’

청년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반대할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청년은 그와는 다른 대답을 했다.

‘그야 모르지요.’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했던 잔악한 행동을 나열했다. 그 행동을 알면서도 일본에 동조하는 것은 민족을 배신하는 거 아니야고 따져 물었다.

순간 청년은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놀랐다. 이런 말을 하고 매질을 당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부드러운 표정을 잃지 않고 휴의는 말했다.

‘조선왕일때는 편안했소. 수탈당하지 않고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끌려가지 않았소. 억욱한 일 때문에 복장이 터져서 죽는 사람 보지 못했소. 한 가지라도 만족한 게 있었소.’

청년이 그 말을 듣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한 휴의가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투로 청년에게 공을 넘겼다.

‘좋소, 다 맞는 말이오.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만 더 묻겠소. 내선일체인데 왜 일본인은 높고 조선인은 낮은데 있어야 하오. 일본인이 지나가면 조선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예의를 표해야 하는지 그것이 한 나라 백성을 대하는 태도로 맞는 것이오.’

이번에는 휴의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나서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샛길로 새어 나가기도 했다. 휴의는 충남 보령이라고 했고 조선 청년은 홍성이라고 그러니 우린 동향이라고 둘은 서로 잠깐 웃었다.

다시 이야기는 시작됐으나 서로 겉돌았다. 휴의는 물었다. 방향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풀어주면 어떻게 할 것이오.’

‘그 길로 다시 독립군에 들어가야지요.’

‘다음에 잡히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텐데도요.’

‘그것이 운명이라는 따라야지요.’

‘어쩌구니 없군요. 독립된 나라에서 무엇 하고 싶은 가요. 수상이오, 장관이오, 아니면 군인이나 경찰이오. 군인이나 경찰은 독립이 없어도 가능하오. 나를 모면 모르겠소. 우리 부대장도 조선인이오. 서천 사람이지요.’

‘나는 내 힘을 믿어요. 내 몸의 빛으로 조선을 밝히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오.’

‘손대지 못한 인생이 아깝지 않소.’

‘다가올 인생을 꾸려나가느냐 마느냐는 나의 자유요.’

이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휴의의 결정만 남았다. 그를 풀어줄 것인지 더 잡아 둘 것인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가 인생의 풋내기 인 것은 분명했으나 철학만큼은 확고했다.

어디서 누군한테 무엇을 배웠기에 그는 고문자 앞에서 자기 주장을 당당히 할 수 있는가. 휴의는 자신이 그와 같은 처지였다면 과연 그런 말을 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휴의는 음식을 주라고 지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이도 같고 동향이라 죽이기는 좀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지금까지 많은 조선인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도 들었다.

그가 하는 신념이 옳은 부분도 있었다.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고 청년은 조선을 택했다. 휴의는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들었다. 살려둬서 그를 좇아도 독립군 대장을 잡지는 못할 것이다.

청년은 이미 신분이 노출됐고 그와의 모든 접선은 차단됐다. 놓아준다고 한들 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마음이 흔들렸다. 봄바람이 분것도 휴의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휴의는 바닥의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부대장은 내일 올 것이다. 그가 돌아오면 깨끗한 자리에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숙소를 청소했다. 닦고 쓸고 문질렀다. 그러다가 조금 열려 있는 서랍에 눈길을 돌렸다.

그냥 닫았다가 궁금해서 다시 열고 그 안의 내용을 꺼내 들췄다. 독립군 타격 일지였다. 봐서는 안될 것 같기도하고 봐도 별 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한 번 어떤 내용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일지는 하루 일과를 시간순서대로 나열한 다음 마지막에 총평하는 것으로 끝났다. 내용이 짧았기 때문에 서너 달 치를 삼십분 정도에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휴의는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누가 보고 있는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없는지 두리번 거렸다. 그는 숙소를 나와 태연히 연병장을 가로 질렀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늦은 벚꽃이 의자 위에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다. 그는 고민했다. 자신이 단독으로 돌진했다 놓친 사건에 대한 평이 마음에 걸렸다.

부대장은 조선인들의 무모함과 전략없음을 자신탓으로 돌리면서 조센징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했다. 조직으로 침투하지 않고 단독으로 실행한 것은 성공해서 독차지 하려는 조센징의 나쁜 습관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번 일부 작전 성공이라고 보고서에 올렸다는 말은 거짖이었다. 말로는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달리 쓴 것이다.

일주일 뒤의 것은 자신의 직속 부하는 아직 애송이인데 열의만 있을 뿐 지략이 떨어져 고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런 자들은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예의 주사하고 있다며 경계 인물로 휴의를 지목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이 것으로 독립군 토벌의 먹잇감으로 그들에게 넘길 조센징을 물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휴의는 자신이 독립군에 잡혀 고문 당하는 상상으로 머리가 갑자기 어지러웠다.

죽자 살자 일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어쩔 것인가. 휴의는 고향의 부모를 생각했다. 득의만만할 때는 떠오르지 않던 모습이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어떤 굴욕에도 참고 견뎠으나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자 휴의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점례는 어디있을까, 문득 그는 점례를 보고 나서 죽어도 죽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고 자신과 미래를 언약했던 점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본가면 공장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어 온다는 말은 사실일까. 잘못된 길로 끌려 간 것은 아닐까. 휴의는 심란했다. 며칠 사이로 자신의 처지가 뒤바뀐 것을 알고 그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마음을 서둘렀다.

부대장이 돌아오면 선택할 시간은 없다. 자신은 무모한 작전에 희생될 것이 뻔했다. 조선청년이 문득 떠올랐다. 그와 함께 도망치면 어떨까 싶었다. 아예 고향 죽마을로 숨어 들수도 있고 만주나 상해로 갈 수도 있다.

아니면 러시아로 가서 평생 농사만지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살고 나서 나중을 도모하자는 생각에 휴의의 마음은 바빠졌다. 풀이 죽은 그가 다시 청년 앞에 섰다.

그동안 청년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휴의에게 다짜고짜 같이 손잡고 독립운동하자고 제의했다. 토벌대 군인에게 항일 투사가 이런 제의를 했다.

독자들은 어이없어 할 것이다. 아무리 짜맞추려고 해도 정도가 지나쳤다. 휴의의 마음을 알아챘다고 해도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청년의 어이없음을 꾸짖을 것이다.

독자들이 생각할 때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은 이상 그런 제의를 할 수 는 없었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휴의가 반응을 보였다.

풀어주면 숨어 살 곳은 있는지 물었다. 오래 도록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안전한 곳에 머물곳을 청년은 알고 있었다.

'나와 같이 손잡자. 나이도 같고 고향도 같은 조선사람이 끼리끼리 뭉쳐야 하지 않겠나.'

휴의는 의자뒤로 가서 청년의 묶인 손을 풀었다.

‘방금 생각한 것인데 여기 조선인 일본군이 나 말고도 7명이 더 있다. 그들과 함께 힘을 모으면 어떻겠소.’

그러자 청년이 단호히 반대의사를 보였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필경 체포될 것을 염려했다. 휴의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자신이 신임하는 한 명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실탄 창고에서 무기와 권총 기관단총 수류탄을 넉넉히 챙겼다. 휴의는 저녁 점호를 마치고 막사밖으로 빠져 나왔다.

잡혀온 조선 청년은 죄가 없어 무죄방면 한다는 내용은 미리 고지한 상태였다. 그리고 내일 부대장이 돌아오면 어떤 식으로든 시달림이 있을 터이니 오늘은 일찍 취침하라고 아량을 보였다.

의심을 미리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