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의는 자신이 한 일 때문에 평가받은 사실이 너무나 좋았다. 그로 인해 그는 현명한 사람이 되었다. 누가 알아서 붙여준 것이 아니다. 순전히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다.
부모 잘 만나 단단히 한밑천 잡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명을 받으며 일어난 휴의는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느낌이었다. 새 옷을 입고 뽐내기 위해 당장 시내로 달려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만 그랬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은 조직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기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는 것이 답답했다. 반대편에 길이 있는 것도 모른다. 오직 외길만이 그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거칠고 험난 일을 해도 양심은 온전하다. 하는 일에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21살이 아닌가. 아니 그 나이에 휴의는 자신이 그런 위치에 올랐다. 죽마을 떠난 지 불과 이 년에 만에 이룬 성과였다.
그는 고향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한 달이라도 먼저 입대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큰 사람이 됐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도 있었으나 지금이라도 이 위치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부대장이 상부 보고를 이유를 떠난 후 휴의는 잠시의 휴식을 보냈다. 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세월은 좋았고 그 좋은 세월에 꽃들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벚꽃이 만개한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해마다 봄이면 작은 나무를 가져와 학교 운동장에 심었고 큰 길가에 커가는 나무를 보면서 자신도 나무처럼 두꺼워지는 것이 좋았다. 벚꽃은 일본 국화였다. 아니 우리나라 꽃이었다. 그래서 휴의는 만주에서 보는 그 꽃에 더 애정이 갔다.
그는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일을 할지 상상할 수 없었다. 이 일은 천직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부대장이 거쳐왔던 교관의 길은 어떤가 그려봤다. 본국에 가서 제자들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여기서 배운 실전 경험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그것을 후배들에게 전수시키는 것이 또다른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육사생도의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 어른 거렸다. 졸업 후 장교가 돼서 조선에 근무하거나 만주로 와도 좋고 아니면 더 큰 세계로 가도 좋았다.
어느 때든 반동의 세력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자들을 미리 잡아들여 후환을 없애는 것은 자신처럼 사명감이 투철한 군인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점례는 잘 있을까. 동휴는 왜 점례의 소식을 말해주지 않았는지 휴의는 그것이 가끔 궁금했다. 그의 말마따라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다. 알고서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것이 조직의 비밀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일을 하고부터 휴의는 동휴를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언가 조금은 숨기는 듯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상대방은 알지 못하는 묘한 분위기가 그렇다.
그의 입장에서 라면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동휴는 자신보다 앞서 그것을 알고 실천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휴는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휴의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본토 유학을 부대장에게 건의해 보기로 했다.
생각해 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말하지 말 것은 혹시 거기 가면 점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점례 생각을 하지 않고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문득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시도 때도 없이 불현 듯 떠올랐다.
고향도 부모도 거리만큼이나 자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점례는 늘 자신의 근처에서 맴돌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 위치에 있는 걸 점례는 알까. 알면 나를 더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지 않겠는가. 여자는 남자의 지위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다가 휴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출세에 점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가능하면 일본여자와 결혼해야 한다. 그것도 평민이 아닌 장교의 자식이나 정치인의 먼 친척이라도 좋았다.
그는 부대장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스스로 양반이 아니라면 양반의 처녀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 그래야 뻗어 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예상치 못한 위기의 순간에는 그곳에서 쉽게 빠져 나 올 수 있다. 그런 생각에도 휴의는 점례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은 그것대로 나두기로 했다. 떨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떼내지 않았다. 그러나 상념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는 더 머물면 골치만 아를 것 같아 옷을 챙겨입었다.
노느니 시내 정탐을 나가자. 제국주의의 성공을 위해 잠시라고 엉뚱한 곳에 한눈을 파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자책했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는 의미로 뺨을 조금 세게 꼬집었다. 그리고 군화를 챙겨 신었다. 그가 끈을 조이고 막 나가려고 할 때 밑의 졸병 하나가 급히 다가왔다.
엊그제 잡아온 조무래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고문 끝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휴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죽든 말든 죽으면 알아서 처리하라는 듯이 가볍게 응수했다.
그런데 졸병이 이 자가 아무래도 조직의 상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다고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휴의도 그가 어떤 자인지는 간략히 알고 있었다.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조선 출신은 잡아 들이다 보니 한달새 벌써 삼십 명이나 그렇게 됐고 두 명을 죽이기도 했다. 그 결과로 일이 잘되어 간 측면이 있다.
죽음의 효과는 컸다는 말이다. 만주의 조선인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독립군의 하부조직 일부를 찾아내 일가를 멸족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부대장은 이곳 활동은 이 정도에서 끝내고 상해로 다음 달에 이동해 본거지를 아예 박살 내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만주의 활동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 들었다. 휴의가 조금 여유를 부린 것도 더 볼 재미가 이곳에서는 사실상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작전 종료 직전에 휴의는 자신의 부대가 재미 삼아 음식점에 있는 모든 사람을 체포했고 그 가운데 조선족 청년 하나를 잡아 온 것을 기억했다.
점심이 훨씬 지난 오후 세 시경 소대병력은 연습삼아 혹은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작전을 펴 음식점을 에워쌌고 그곳에 있는 주인장을 포함해 13명을 부대로 끌고왔다.
신분이 확실한 중국인 주인과 나머지는 그날 밤 다 석방됐는데 조선 청년 하나는 잡아 두었다. 이 청년도 의심 때문이 아니라 출타에서 돌아오면 부대장에게 자신들이 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냥 잡아둔 것이었다.
그래서 휴의도 직접 심문에 가담하지 않고 졸병이 심심풀이로 아무거나 묻고 형식적인 보고서를 쓴 다음 석방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잔혹한 짓이 되레 역풍이 불어 민심이 이반 될 것을 두려워한 이제는 좀 살살하라는 부대장의 유화정책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잡혀 온 그 시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음식도 먹지 않고 그냥 주는 매만 맞고 있다는 것이다. 휴의는 직감적으로 그 자가 독립군 일망타진의 어떤 실마리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심문해 보기로 했다. 몰골이 엉망이 된 모습에 휴의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직접 한 고문의 결과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은 확실히 싫은 느낌이었다.
뭐랄까, 사람이 어떻게 저 지경이 되고도 참을 수 있을지 하는 지독함에 대한 경멸 같은 것이었다. 의자에 묶인 그는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그냥 나갈까 생각했다. 곧 죽을지도 모를 녀석에게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섰다. 지금까지의 용의자와는 달리 어떤 이상한 기분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에게 물을 끼얹어 정신이 들게 하라고 지시했다.
찬물을 맞은 얼굴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가 옆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다시 물이 쏟아졌고 청년은 약간 정신이 돌아온 모양인지 실눈을 뜨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휴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구사하고 싶었다. 고문 말고 색다른 취조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문이 가장 빠른 자백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정신이 강한 사람에게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자신만이 세운 원칙이 그 순간 작동했다.
그래서 처참해 졌음에도 이름이나 나이조차 밝히지 않은 이런자에게는 고문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한 참 후 깨어난 그에게 휴의는 심문 대신 치료를 시작했다.
상처를 꿰매주고 약을 먹였다. 그는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으나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들이 고문할 때처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삼 일간 안정을 취한 그는 거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휴의는 밥을 들여보냈다. 씻을 수 있는 따뜻한 물도 제공했다. 나름대로의 대접이었다.
그 다음날 휴의는 조선 청년을 찾았다. 그리고 귀중한 보석을 감정하는 듯이 청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상대는 무안을 느끼지 못했다.
부대장은 아직 베이징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모두 내보낸 뒤 단둘이 남자 조선 청년에게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로 질문을 시작했다.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휴의는 긴말 대신 짧은 말의 문답을 원했다. 친절한 행동을 했으니 너도 그에 보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미안한 감정이 들기를 바라면서. 어차피 시작은 우리가 먼저 했고 매듭은 그가 져야 한다.
그가 아무말 이나 한다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이자를 풀어 주고 싶었다. 어차피 곧 상해로 떠나는 마당에 선의를 베풀고자 했다. 말하자면 만주와 작별하면서 화해의 손짓을 내미는 것이다.
혹시 알겠는가. 내가 독립군에 잡혀 취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때 이 선행이 보답을 해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눈곱만큼도 바라지 않았지만 말이다.
휴의는 진부한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대신 말을 걸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사슬에 매어 있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이니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도 좋다고 허락했다.
알고 있거든 말하고 모르거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둘러댈 것도 거짓으로 말할 것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은 해도 좋다. 그래야 죽어도 속 시원하지 않겠느냐.
네가 대답을 거절한다고 해서 내가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인상도 없었다. 윽박지르지도 않고 불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잘못 잡아 왔으면 정중하게 사과하고 돌려보내겠다.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아서 이런 방식으로 대한다는 비아냥도 없었다.
밑천이 달려 새로운 방법을 쓰는 것은 아니다라고 휴의는 말했다. 내가 나섰으니 불든 죽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양자택일로 몰지지 않겠다고도 약속했다. 네 기억에 자신이 없으면 기억나는 것만 말해도 좋다. 무언가 무서운 일이 남아 있다는 공포는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된다. 변명해도 괜찮다.
날개가 빠져 죽어가던 두 발 달린 새가 동면에서 막 나온 뱀처럼 꿈틀거렸다. 금세 꺼져 갈 것 같은 그의 흐릿한 눈에 기름 먹은 심지를 타고 올라온 불길처럼 잠깐 빛이 났다.
미리 준비한 말이 있기라도 한듯이 조선 청년이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도 좋을 인물인지 아닌지 판가름 하려는 듯 두 눈이 상대의 눈을 응시했다.
휴의는 누군가의 든든한 보호자가 자신이라도 되는 듯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너보다는 내가 훨씬 침착하다는 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