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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0:17 (금)
그날 이후 여러날이 지났으나 그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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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여러날이 지났으나 그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07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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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와 헤어진 조선 청년은 한동안 자신의 직분을 잊을 만큼 그녀에 빠졌다. 남자가 휘청일 만큼 빼어난 미모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에게 다정한 호감을 보여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도 그녀에게 남자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외모나 성적 매력 외의 것이 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경험 많은 사람에 대한 일종의 예의였다. 비싼 옷차림도 아니었다. 갖춰 입지 않아도 그녀는 차려입은 사람보다 더 정숙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인간의 자격 같은 것이  점례를 싸고돌았다. 마치 이른 아침 강가의 물안개처럼 말이다.

단정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만주에 온 지 삼 년 만에 청년은 따뜻한 것이 자신에게 한 발 다가온 것을 알았다.

온기가 넘치는 국밥 같은 그녀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말랐다 싶은 만큼 작은 체구에 조용히 다문 입술에서 떠올랐던 작은 미소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여러 시간을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잠결에 보는 꿈결처럼 아득했다. 비현실적인 것이 하루 만에 일어난 것이다.

청년은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여자는 잊었다. 오직 그녀만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청년에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공작원에게 이성은 금기였고 그것 때문에 일을 도모하기 전에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대장은 늘 그것을 지적했다. 조선의 독립만을 생각하고 그것은 나중에 하라도 경계했다.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것이 그리 말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이것은 명령과는 다른 것이었다. 지키지 않아도 알 수 없는 지휘체계 밖의 일이었다.

우연과 필연과 운명이 겹쳐져서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기차에 탄 것도 기차에서 자신을 도왔던 것도 모두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끌려온 것이다.

청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를 향해 그러지 말아야지 그래도 괜찮아, 하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음 때문에 그는 빙빙 돌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인생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도 이것은 자신이 혼자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권총으로 누군가를 쏘고 쏘지 않아야 하는 상황과는 달랐다. 청년은 조선독립의 과정을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꿈을 꾸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그녀가 끼어들어 어떤 의미로 남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가 나타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풀거나 매듭짓는 일이 모두 그녀 몫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없었다. 그의 일상은 이제 완전히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모든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점례만큼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 철저하게 만주에서 이방인이었던 청년은 이곳이 이제 고향 같이 아늑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이방인으로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고쳐주고 더해주기로 작정했다. 어딘지 모를 신비로움에 숨겨진 비범한 능력을 밖으로 끄집어내 세상에 유용하게 써야 한다.

무슨 일로 여기에 왔을까. 그림 공부 때문이라고 했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스케치나 물감은 신분 위장용이 아닐까.

물론 스케치 수준은 화가라고 해도 의심 살 만한 이유를 대자면 못 댈 것도 없었다. 더구나 만주에서 화가 수업은 어울리지 않았다. 조선에서도 얼마든지 화단에서 이름을 날 릴 수 있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춘 동지가 있다면 그녀에게도 어울릴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그녀를 애인이 아닌 동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도와준 용기에 그는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자문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위기의 순간에 몰리면 인간은 먼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점례는 태연하게 자신을 위험에 빠트렸고 보기 좋게 벗어났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조선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렇게 됐고 지금 살아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조직의 비밀을 털어놓는 장면에 이르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문의 아픔과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조직의 대장이 체포되고 만주 지역 항일 조선인 단체가 와해 되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기차를 조사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의 검문이 반드시 정보를 사전에 안 일경이 항일 단체를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친 것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심문은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쫓고 있는 용의자가 탑승했다는 확실한 첩보를 입수하고 반드시 체포하겠다는 의지를 헌병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직 내에 밀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조선 청년은 알지 못해 답답했다. 그날 이후 여러 날이 지났으나 그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대장에게 보고할 것도 뒤로 미뤘다. 감시자를 따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시내의 번잡한 곳에 모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장소를 여러 번 바꾼 끝에 청년은 조직 상부자를 만나 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접선을 시도했다. 중국 음식점에서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 흉내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선말을 쓰지도 않고 그저 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르켰다.

주인장에게 어디 나라 사람인지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고 혹 음식점 내에 숨겨둔 첩자가 있다면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탄로 난 것이다. 일본군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들이닥친 것을 보면 그들도 우연히 검문을 하다가 낌새를 챘거나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아무나 잡아가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휴의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는 그런 내막을 부대장에게만 보고했다. 그 역시 조직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의는 부대장과 직접 면대면으로 보고했고 보고한 내용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부대장은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어떤 때는 자신도 믿지 못해 방황했을 정도이니 휴의에 대한 신뢰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사상적으로도 인간적인 면에 있어서도 부대장은 휴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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