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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자신을 위해 그는 교관의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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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자신을 위해 그는 교관의 말을 따랐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0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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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교육을 받고 휴의는 만주의 한 부대로 투입됐다. 열차 안에서 그는 배운건 없지만 사상이 건전한 시골 청년이라는 동휴의 추천서를 읽었다.

‘친구는 친구다.’

동휴는 점례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를 불편하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미안했다. 이 추천서는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어디로 배치될지 어느 전선으로 갈지는 서장의 붉은 인장이 찍힌 이 종이쪽지 하나로 갈리게 돼 있었다. 도장의 옆 공란에는 천황을 위한 애국심이 남다른 청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 있었다.

일본군은 그를 항일 독립군을 색출하는 토벌대의 일환으로 발탁했다. 이 정도라면 조선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는 않겠다는 판단이 섰다.

실제로 교관이 대해본 휴의는 말을 잘 듣고 의심하지 않으며 시키는 일은 제대로 해냈다.

배우는 능력도 빨라 소대원의 이름을 외우거나 암호를 치는 것도 다른 병사에 비해 쉽게 적응했다. 처음에는 손을 꼽아 계산했으나 어느 순간 머리로 척척 해냈다.

총도 잘 쏘고 체력도 나무랄데 없었다. 완전군장으로 한 시간 구보도 힘들지 않게 해냈다. 같이 간 동기 300명 중에서 10등 안에 들을 만큼 우수한 성적이었다.

넘어진 동료가 일어나지 못해 위험에 처하면 뒤돌아서 일으켜 세웠다. 대검을 꺼내 들고 달려드는 교관은 넌 뭐야 하는 노려움을 드러냈으나 그의 군인정신을 높이 샀다.

이미 눈이 돌아가 더는 뛸 수 없는 병사는 비틀거리면서도 등에 엎고 달렸다. 그는 동료의 수치를 감춰주고 자존심을 지켜줬다. 지지 말자고 다독였다. 앞서간 그들보다 못한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그는 틈틈이 용기를 줬다.

붉은 벽돌 건물을 돌아서 연병장에 집할 때는 낙오병이 꼭 한 두명 나왔다. 선두 무리에 섰던 그는 낙오병과 함께 꼴찌로 들어왔다.

당연히 매질이 시작됐다. 네 깐 놈이 뭔데 그러느냐고 교관은 욕설과 함께 개머리판으로 찍었다.

그것도 힘들고 귀찮으면 조교는 나중에는 머리를 땅에 박도록 하고 발로 걷어찼다. 옆에 있던 교관은 그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그 모습을 빼놓지 않고 지켜봤다.

도열한 나머지 훈련병들은 숨소리를 멈추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불똥이어디로 뛸지 모르는 삼엄한 순간이었다.

휴의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낙오병 때문에 미련스럽게 벌 받는다는 훈련병들의 시선을 몸에 받았으나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매질을 견뎌냈다.

조교는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이번에는 주먹질로 가슴팍을 갈겼다. 권투선수처럼 한방에 끝장 내려는 듯이 뒤로 팔꿈치를 밀었다가 앞으로 당기면서 명치를 가격했다. 제대로 맞은 병사는 혀를 내밀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끝내 일어서지 못하면 벼린 대검의 칼끝이 꿈뜰거리는 허벅지를 노렸다. 그들에게 안된다는 것은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더구나 지금은 본보기가 필요했다. 저러다가 사람죽겠다는 상황에 오면 휴의가 나섰다.

다음에는 낙오가 없도록 하겠으니 이번만은 용서해 달라고 사정했다. 교관은 어이가 없었다. 수많은 신병을 받았으나 이런 놈은 처음이었다. 생각같아서는 권총을 꺼내 머리를 갈겨도 시원치 않았다.

그러나 아량을 보는 주는 것도 훈련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꺼냈던 권총을 만지작거리다 권총집에 집어넣었다. 딸깍하고 단추 잠그는 소리를 들으며 휴의는 충성을 다짐하는 경례를 크고 우렁차게 올려 붙었다.

오늘은 무사했으나 다음날에는 사망자가 나왔다. 애초 나약했던 그들 가운데 일부가 견디지 못 했던 것이다. 살려고 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실려가는 그들은 병원이 목적지가 아니었다.

이웃한 유격장 옆의 공터였다. 차출된 조선인들은 땅을 파고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를 그들을 묻었다. 어떤 무덤에는 두 팔이 밖으로 나온 것도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팔을 감출 흙이 부족해서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애국심이 부족하면 저 꼴을 당한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모든 것은 애국으로 통했다. 살아남은 자는 애국심이 투철한 자로 인정받았다.

묻히고 묻는 자들 가운데 장례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는 없었다. 따라서 죽은자가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몰랐다. 고요한 침묵이 무덤처럼 스산했다.

그뿐이었다. 전국 팔도에서 온 장정들은 씩씩하게 시작했으나 처참하게 마무리됐다. 하라는 대로 했으나 끝내 살아남지 못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관의 말에 반대 방향으로 갔다면 죽은 자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명령을 따랐다가 그렇게 됐다. 쫄쫄 굶고 얻어터지다가 죽었다.

몸은 바짝 말랐고 뼈만 앙상하게 드러났다. 얼마나 말랐는지 두 겹으로 겹쳐도 겨우 한 사람 분량이었다. 교관이나 조교는 훈련병을 적처럼 대했다. 잡혀온 포로도 이 정도는 대우는 받지 않을 것이다.

훈련병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살리기 위해 죽인다고 했다. 죽어야 산다는 말도 했다. 다시 교육은 시작됐고 훈련병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기진맥진한 입술에는 쟁기질로 지친 소처럼 허연 거품이 품어져 나왔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전선에서 견딜 수 없다. 휴의는 죽은 동료를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전시이니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잠시 쉬는 시간이면 침울한 그들을 다독이는 것도 휴의의 몫이었다. 그는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는 몰랐다.

다만 살아서 고된 교육을 마친 인원이 많을수록 전투력이 상승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휴의는 알았다.

그런 휴의를 교관들은 눈 여겨봤다. 의협심이 강한 그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순간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다. 훈련병 가운데 남달랐고 리더십이 타고났다. 지휘관은 그를 소대장으로 삼고 아꼈다.

소대원이 잘못하면 그를 닦달했고 잘하면 칭찬으로 사기를 높였다. 훈련은 잔인하고 더 혹독했다. 삼일째 부터는 쓰러지는 병사에게는 찌르려고 대검을 꺼내들었다. 교관은 권총을 쏘면서 이를 갈았다.

살려면 일어나야 했고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야 했다. 기특한 것은 이런 훈련을 받고도 불만이 없었다. 있다면 지체하는 전선 투입이었다.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린 것은 혹독하기도 했지만 전선 투입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일주일 만에 그들은 눈이 달라졌다. 번쩍이는 살기가 가득했고 누구든 걸리면 죽인다는 의욕이 앞섰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살인의지가 채워졌고 피의 향에 길들여 졌다. 피 냄새를 맡지 않은 날에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자다가 일어나 두들겨 맞고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흘러야 제대로 잠을 잤다. 꽉 조여 맨 가죽 혁대로 얼굴이 찢어져야 그날 밤이 무사히 지나갔다. 피맛은 그렇게 그들의 일상이 됐다.

짐승처럼 대했던 교관들의 애초 목적이 달성되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늑대가 그들이 원하는 최종 인간이었다. 훈련은 순전히 거기에 집중됐다. 효율을 위해 인간은 거세되고 그 자리에 짐승이 들어찼다.

넘어진 자는 불의한 자이며 그런 자를 제거하는 것이 정의였다. 넘어지지 않고 찔리지 않는 자들은 정신적 승리감에 도취됐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 같은 것은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순진한 조선 청년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주면 먹고 때리면 맞았다.

일주일 훈련의 마지막 날 저녁 교관은 휴의를 따로 불렀다.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순사 동휴와는 어떤 사이인지 물었다. 같은 마을 친구로 자랐다고 했다.

그는 동휴의 추천서가 마음에 든다며 특수부대로 차출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적은 외부에 있기도 하지만 내부에도 있다고도 했다. 같은 신민끼리 적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증오했다.

그런 놈들을 완전 소탕 하는 임무를 네게 맡긴다고 했다. 그 일은 매우 중요했다. 아무나 맡는 일이 아니었다. 내부의 적은 잘 보이지 않고 숨어서 게릴라 전을 한다고 했다. 폭탄을 투하하고 사라지고 저격하고 숨는다고 했다.

그런 자들을 잡는 것은 애국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고 교관은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막중한 임무를 주는 것은 동휴의 추천서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인 순사 동휴를 본받아 너도 훌륭한 군인이 돼라고 손을 잡았다. 거친 그 손을 잡을 때 휴의는 깜짝 놀랐다.

잡은 그 손이 얼마나 자주 자신의 뺨을 때렸고 목을 쳤는지 알기 때문에 잡는 순간 망설여졌다. 그러나 거칠기는 했으나 따뜻했다.

교관이 잡은 손을 흔들었다. 너를 믿는다는 눈초리가 가슴에 박혔다. 잔인한 얼굴은 사라지고 인자한 얼굴만이 남았다. 두 얼굴이 한 얼굴이 됐고 그 한 얼굴이 활짝 웃었다.

휴의는 그 순간 대일본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비로소 만났을 때 느끼는 남자의 감정을 휴의도 똑같이 받았다.

자신은 이미 훈장을 받은 훌륭한 군인이었다. 동휴가 고마웠다. 자신이 잘 된 것은 전부 그의 공이었다. 그는 그날 부로 독립군 토벌대의 소속이 됐다.

군복을 입을 때도 있었고 만주 시내를 돌때는 사복 차림이었다. 현장을 급습하고 의심분자를 색출하는 일은 고도의 심리전이 필요했다.

그는 조선인이 조선인의 마음을 잘 알고 행하라는 교관의 말을 늘 되새겼다. 그리고 같은 신민이 돕지는 못할망정 무슨 독립이냐고 이를 갈았다.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그들이 말하기도 전에 빨갱이를 때려 잡자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독립군 토벌은 그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덫을 놓고 기다리기도 했고 깊은 산속이나 밀집한 민가를 덮치기도 했다.

때로는 진창을 기어가거나 오물 속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총을 겨눴다. 사람이 아닌 짐승을 잡는 것은 그의 임무였다.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망설였던 그에게 이제 그런 것은 없었다. 디딜 곳은 확실히 정해졌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대일본 조국을 위한 일이었다.

휴의는 그런 일에 자신이 끼어든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그는 교관의 말에 무조건 따랐고 그를 신처럼 숭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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