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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를 출발한 기차는 경성을 향해 남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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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를 출발한 기차는 경성을 향해 남으로 달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02 1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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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몇 줄 읽다 그만두었다. 눈은 글자를 따라 갔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유지는 안전할까. 만주를 떠나 태평양 어딘가로 떠난다고 했다. 굳이 더 힘든 곳으로 가는 이유를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너와 같이 있을 수 없다, 경성으로 돌아가서 나를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는 책갈피 속에 있는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네 개의 눈과 차례로 마주치면서 아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빌었다.

이제 혼자가 된 그녀는 다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하기만 했던 삶이 이제는 온전히 자신 혼자 해결해야 한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오래갈지 알 수 없다.

그녀는 또다시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도 좋다고 말한 주인을 원망하는 노예처럼 그녀는 대해에 홀로 위태롭게 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방은 고요했다. 어디로 떠밀려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도착지가 어디든 그녀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를 느꼈다.

헤쳐나가야 하는 숲길은 무거운 돌과 무서운 가시 천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 역시 감당해야 할 것임을 알았다. 대신 누가 해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에 없던 오기가 갑자기 생겼다. 노가 없으면 손으로 저어 나가면 된다.

경성의 유지 삼촌이 도와줄 것이다. 여기보다 나은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있어도 좋다고 환하게 웃는 삼촌의 얼굴은 아버지가 송아지 한 마리를 사 왔을 때 웃는 그런 웃음과 겹쳐졌다.

엄마가 장에 가서 옷감 한 벌과 자수용 실을 사 왔을 때 짓는 웃음과 같았다. 구한 거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시 오라고 삼촌은 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내 집처럼 사용하라는 삼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화장대도 사주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바꾸어도 좋다고 삼촌은 당연히 해야 할 말이라는 듯이 하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작고 아담한 숙모 또한 그렇게 하라고 거든다.

그녀는 한꺼번에 많이 먹어 부른 배를 가볍게 치면서 더는 먹을 수 없다고 사양하는 자신의 겸손을 미리 체험했다.

점례는 어느 순간에도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언제든지 그들에게 매달릴 것이다. 더구나 삼촌은 그림을 원하는 점례의 소원에 따라 이것저것 가르치면서 조선의 유명화가로 키운다.

그러기 위해 드는 돈은 점례가 벌 것이다. 연필도 그것을 깎는 칼도, 물감을 담을 화구도 점례는 자신이 벌어서 살 자신이 있었다. 이것만큼은 그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최소한 자존심이다.

그러자 그녀는 혼자여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댈 언덕이 있으니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일본에 있는 유력 정치가인 그의 아버지 또한 든든한 버팀목이 아닌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들의 눈에 드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점례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유지 호사카를 위해 마음을 다해 진력하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대한 보답이다. 그와 함께 소비했던 다정했던 순간들에 대한 감사였다.

지금 비록 장마철의 날씨처럼 변덕이 심하지만 이 마음 만큼은 순전히 그의 것이었다. 악착같이 일하고 밤새워 배우겠다. 한순간도 빈둥거리지 않을 자신감으로 점례는 뭉쳐 있었다.

군인처럼 철저하게 무장해서 크게 성공하는 조선 화가가 되겠다. 어느 순간 그녀는 홀로 우뚝섰다. 그래서 혼자였을 때 점례는 되레 당당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다음 역에서 내릴 수도 있다. 역 주변에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적당한 가격에 흥정한다.

그녀는 손에 든 것을 흔들면서 콧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내린 곳 주변의 경치가 좋은 여관에 들어 며칠 묵고 간다. 그리고 구경하다가, 구경하다가...점례는 거기서 앞으로 나가는 생각을 멈추었다.

행복하던 점례가 샛길로 빠진 생각을 갑자기 바꾼 것은 며칠 전 헤어진 조선 청년이 눈 앞을 가로막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점례는 청년을 보자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유지를 걱정하던 그녀는 만주 청년의 앞길에 거대한 산에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가 산을 넘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에게로 달려올 수 있을까.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쓰며 청년이 나를 부르고 있다.

그녀는 마주 달려나가다가 멈칫했다. 아니다. 그를 만나는 것은 유지를 배신하는 것이다. 그녀의 생각은 끝이 없었다.

느린 속도로 가는 기차는 그녀에게 무엇을 상상하든 자유라고 일깨워 주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이 다른 길로 가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그러면서 어려운 시기는 끝났고 지금은 만족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봄이 오는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의 꼭대기에는 흰 눈이 덮여 있었고 초원은 회색의 때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기차 안은 가득한 사람들이 내 뿜은 열기로 후끈 거렸다. 춥기는커녕 되레 더울 지경이었다. 그럴 때는 창밖을 보면서 몸을 식히는 것이 좋았다. 간혹 창밖으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처음 보는 모양의 사각형 집들이 슬쩍슬쩍 스쳐 지나갔다.

길고 긴 여행이었다. 기차는 경적음을 울리며 역마다 섰고 선 다음에는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일경들은 간혹 올라탔으나 만주에서와 같은 심한 검문은 없었다. 대개는 한 번 눈으로 훑어보고는 그냥 내렸다.

괜히 올라와 시간 낭비만 했다는 표정이 경찰의 뒷모습에 고스란히 찍혔다. 승객들은 완장 찬 그들의 등장에 놀랐다가 이내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고는 각자 떠들던 대화에 열중했다.

신의주에 내린 경찰들은 각자의 위치를 찾아가기 위해 왔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말하고 걷고 돌아서는 모습도 그랬다. 동휴가 의심스러웠다. 점례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확인하기 위해 창가에 눈을 바짝 기댔다.

틀림없다는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동휴가 맞는 것 같다. 아니 동휴였다. 그가 아니면 점례가 본 듯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리가 없었다. 

그가 경찰이 됐나. 그럴 수 있다. 죽마을에서 순사의 하인 역할을 하면서 읍의 말단 서기였던 것이 동휴였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 것이다.

점례는 그가 순사를 따라 용희네 집에 왔던 것을 상기했다. 그녀는 그때 이불 속에서 오금이 저렸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해 냈다. 발을 꼬면서 긴장으로 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었다.

동휴가 경찰이다. 점례는 자신의 길을 찾아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동휴가 멋지게 보였다. 일본인 경찰에서 느꼈던 불안함이 조선인 경찰에서는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조선인은 모두 같은 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자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는 그동안의 원한도 멀리 떨어져 나갔다.

점례는 또다시 홀가분했다. 동휴는 몰랐을 것이다. 그런 곳으로 자신과 용희가 갈 것을 미리 알았을 리 없었다.

착한 마음으로 일본에 가서 돈 벌어 오라고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래서 떠나기 전날 부모님이 고맙다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선택받은 사람이 하필 자신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어려움에 처해 죽겠다고 자수를 뜬 천의 끈을 묶었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저주하는 마음 대신 그가 죽마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를 바랐다. 순사의 횡포를 막아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너 때문에 돈도 많이 벌고 훌륭한 화가가 됐다.’

뒤따라 내려볼까, 점례가 멈칫거리는 순간 기차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동휴는 휴의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점례는 갑자기 휴의가 보고 싶었다.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어부가 바람이 어서 잦아들기를 바라는 심정이 점례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겨우 걷기 시작한 막 돌을 지난 아기처럼 아장거려서라도 동휴에게 닿아야 했다. 점례는 아직 잡지도 않은 생선을 어디부터 손질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 부절했다.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점례는 미워지기 시작했다. 눈썰미 없음을 자책했다.

기차가 더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점례는 그에게 아는 체를 하면서 다가갔을 것이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상관치 않겠다. 당황하든 말든 모른 척하든 휴의는 잘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계산 착오라고 나는 동휴가 아니라고 동휴가 머리를 젓고 있다. 이해 할 수 없는 말로 둘러 대면서 나는 일본경찰이 아냐, 그런 말을 되풀을 하면서 동휴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달려갔다. 

종일 팔리지 않은 만주역의 쌓인 물건처럼 점례는 갑자기 축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도 없이 자기 나라에서 추방된 비참한 인간의 기분으로 점례는 멍하니 눈길을 밖으로 주었다.

신의주를 통과한 기차는 목적지인 경성을 향해 남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밤이 지난 지 한 참 이어서 밖은 이미 깊은 어둠에 잠겼을 때 점례는 깜박 졸았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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