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3-29 00:24 (금)
오랜 경험에서 오는 예감이 가는 발길을 잡았다
상태바
오랜 경험에서 오는 예감이 가는 발길을 잡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31 17: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차에 앉은 점례는 만감이 교차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도대체 일년도 채 안되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가.

일일이 손꼽아 보다도 헤아릴 수 없다. 죽 마을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아 점례는 과거를 회상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마치 백 살은 산 노인처럼 그녀는 여기 저기 금이 간 인생전체를 들여다 볼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기차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익숙하기도 했으며 낯설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점례의 의식을 전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었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점례는 서성였다. 두려움은 없었다. 그렇다고 막연한 기대감도 가지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인 지금 상태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점례는 자신의 내면이 다듬어 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지난 시간의 시련이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일들이 점례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예고 없이 닥쳐도 점례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보다 더 한 일이 있을까 싶은 의구심 때문이 아니다. 그저 인생은 현재를 받아 들이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차는 뜸을 들였다. 언제 출발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나 하고 두리번 거렸다. 귀를 세우고 누가 하는 말이 기차 출발과 연관이 있나 살폈다.

그만큼 다들 어서 움직였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시간에 쫓겨 막 올라탄 사람은 기차가 떠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긴 시간 동안 덜 고생하게 될지 눈치를 살폈다.

어떤 이들은 일행이 없으면서도 행여 알고 있는 사람이 그쪽에 있는 듯이 밀치면서 막무가내로 앞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벌였다. 짜증을 내는 소리, 무언가 자랑할 게 있는지 왁지지껄한 소리로 기차안은 그야말로 난장판과 다를바 없었다.

기대에 부풀어 어디론가 떠나는 자들의 소음을 점례는 무심하게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방을 열고 그가 준 책을 펼쳐 들었다. 유지 호사카.

그는 내게 친절을 베풀었다. 아니 생명의 은인이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점례는 생각할 수도 없다.

책을 펼쳤으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산 속 관사에서 장교와 함께 했던 그 날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책 속에서 그가 준 사진 속의 노부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장교의 부모가 서로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듯이 애정이 듬뿍 담긴 사진이었다. 그는 이것은 부적처럼 간직하라고 점례에게 주었다.

그리고 사진 뒤에 적힌 경성의 한 가게 주소. 점례는 머릿속에 달달 외웠던 그 주소에 다시한 번 눈길을 주었다.

떠나 올 때 유지는 삼촌이 운영하는 화랑에서 일을 하면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 삼촌에게 쓴 편지는 봉투에 담겨 있었으나 밀봉되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열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전해 주라고 하면서 읽어도 된다거나 그러지 말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경성역에 도착하기 전에 그것을 꺼내 읽어 볼 것을 확신했다. 마음 속에 이미 그렇게 결정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 있었다.

삼촌이 운영하는 화실에서 그녀는 화가 수업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유지는 점례에게 말했었다.

‘조선 화가로 성공할 거야.’

점례는 그 말을 곱씹었다. 화가가 된다니. 그녀는 소학교 미술 시간에 화가라는 말을 처음 들은 이후로 그것이 자신에게 붙어 올 줄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의 연속이다. 점례는 경성에서 생활이 안정되면 기록으로 그림으로 자신의 일을 남기고 싶었다. 그녀는 책 갈피에 낀 연필을 만지작 거렸다. 그가 잘 그릴 수 있도록 대검으로 깎아 준 연필심의 촉감이 찌르는 듯이 느껴졌다.

죽마을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엄마도 보고 싶고 휴의의 소식도 궁금했다.

그러나 점례는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모를 대할 용기가 없었다. 다 숨길수는 없을 것이다.

설명을 해야하는 일이 점례는 싫었다.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굳이 알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떠나올 때 점례 그대로 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점례를 알아 볼 사람은 조선 땅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됐다.

복대 속에는 유지 호사카가 준 약간의 돈이 있다. 경성까지 갈 여비와 생활비로 써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허리에 여러번 둘러서 맨 복대안에 든 현금을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배쪽을 눌러 보았다.

돈은 제자리에 있다.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초조한 마음을 알았는지 기차는 손님들의 속을 더 애태웠다.

무슨일일까. 혹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점례는 기차가 폭발하는 상상을 했다.

중국 항일 단체들이 설치한 폭약이 바뀌아래서 재깍 거리면서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은지도 몰랐다. 사건 이후로 철도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더 심해졌다.

역에 도착해서 점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실감했다. 일경은 역의 도처에서 수상한 자를 물색했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검문을 했다.

다행히 점례는 그것을 피하기는 했지만 만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전선과 후방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점례는 여차하면 꺼내들 유지 호사카의 증명서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고 지쳐줄 유일한 무기였다.

한쪽에서 또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헌병이 검문을 위해 기차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호각을 불었다. 기차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뒤이어 모두 꼼짝말고 제자리에 있으라는 고함소리가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 움직일 공간이 없을 것 같은데 헌병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일시에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세 명이 먼저 들어왔고 다시 세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맞은 편 통로에서도 같은 인원이 순차적으로 들어왔다. 점례가 탄 호실에 수상한 자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그 때 한 남자가 점례에게 아는체를 하면서 급하게 다가왔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점례에게 조선사람이냐고 물었고 점례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점례는 그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생각 대신 위험에 빠진 그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채도 좋고 인상이 부리부리한 그는 검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점례는 자신이 헌병이라면 바로 이 자를 끌어 내리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그만큼 그는 기차안에서 눈에 띄었다. 깔끔한 양복에 중절모를 쓴 그가 조선 사람이고 같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내게 보호자가 돼달라고 간청한다.

천봉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순간 점례는 자신은 천점례여야 한다고 직감적으로 결정했다. 그 남자는 감색의 작은 가방 하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는데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아버지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고 고향 경성으로 가기 위해 탑승했다고 그는 말했다. 점례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나직한 소리였다.

점례는 비밀을 털어 놓을 듯한 그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성은 천씨고 아버지 장례 때문에 왔으며 집은 경성이다. 그녀가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점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눈빛을 보았다. 저런 눈빛을 점례는 알고 있다. 더 갈 곳이 없어 구석에 몰린 조선 여자들의 표정이 바로 저 모습이었다.

자신의 처지와 조선 청년의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그걸 받을 자격이 부족하지만 자신에게 자선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그를 점례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애완동물처럼 보살펴 달라는 간절함이 청년의 얼굴 전체에 먹물처럼 번져 있었다. 점례는 흔들리지 않는 감정 조절이 필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청년의 이마에 작은 땀이 맺혔다. 헌병들은 앉은 사람은 서게 하고 선 사람은 몸을 수색했다. 눈빛은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결심으로 가득찼다. 그런 마음 가짐으로 헌병들은 하나의 수색이 끝나면 다른 하나로 옮겨 갔다.

의심이 가는 사람은 바로 하차를 명령했다. 누구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그것이 그들이 정해 놓은 질서였다. 하차는 곧 체포를 의미하고 체포는 고문으로 이어졌다. 내리는 순간 지금까지의 생은 돌이킬 수 없이 변질되는 것이다.

나 하나 몸도 건사하기 힘든데 점례는 짐을 하나 더 얹었다는 무게감을 느꼈다. 한 사람이 끌려 나갔다. 아니라고 무언가 항의하는 그는 권총으로 뒷머리를 맞고 피를 흘렸다.

공포가 순식간에 기차안을 사로잡았다. 조선 청년이 점례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품에 든 것을 꺼내 앉은 점례의 의자 쪽으로 밀어 넣었다.

빨리 어떻게 해보라고 그는 눈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점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총이라는 것을 알았다. 금속성의 차가운 느낌을 점례는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게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복대 아래에 넣은 점례는 태연하게 자신의 검문 차례를 기다렸다. 어쩡쩡한 태도는 되레 의심을 살 만 했으므로 점례는 가능한 한 태연하기로 마음 먹었다. 할 게 있으면 하라는 태도였다.

조선청년이 허물없는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점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엇에 쫒기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점례는 그가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과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다는 두 가지 가정에서 자신은 빠져 있음을 알았다. 어쩌면 더 위험한 것이 자신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점례는 어서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헌병이 조선청년에게 다가오자 그는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러 웃음 짓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볼 것이 무었인지 말하면 대답할 자세를 취했다.

어떤 경우도 속이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헌병은 읽었다. 그런 표정은 늘 있는 일이었다. 일급 수배자도 다 저렇게 한다는 듯이 헌병은 동정을 베풀지 않았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라고 판단했다. 되레 상대를 몰아 부치기 위해 작은 눈을 더 반짝였다. 그 사이 다른 헌병 하나가 점례에게 통행증을 요구했다. 그는 기차표를 꺼내 보여 준 다음 유지 호사카의 신분 증명서를 내보였다.

청년을 검문하던 그가 다가와 어떤 내용인지 서로 물어보는 표정을 지었다.

‘저 신사분은 제 오빠고요.’

점례에게서 청년으로 시선을 돌린 그들 중 하나가 그에게 신분증과 탑승권을 요구했다. 그 때 점례가 나섰다.

‘제 오빠라고요.’ 신분증을 돌려 주지 않고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헌병이 이 장교분과는 어떤 사이냐고 물었다. 혼인을 약속했다고 점례는 말했다.

이것은 사전에 준비된 발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먹혀 들었는지 더는 질문을 하지 않고 헌병들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정을 이야기 했으니 이제 앉아도 되느냐고 점례가 몰아 부치듯이 허락을 구했다.

그런 식으로 답한 사람은 처음이라서 헌병들은 약간 당황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교의 보증은 그들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 전황이 어떻고 유지 장교가 있는 곳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는 그들은 더 묻는 대신 경례를 올리는 것으로 장교에 대한 예를 점례에게 했다.

헌병은 청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직 더 조사해야 할 것이 있다는 투였다. 앉았던 점례가 일어나 그 분은 나의 친오빠라고 한 번더 말했다. 묻지도 않은 이름을 대면서 천봉호가 우리 오빠 이름이라고 했다.

검문을 하던 헌병은 더 실랑이 하는 것은 의미 없다는 듯이 그 말을 뒤로 하고 다른 사람 앞으로 갔다. 그러나 곧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데도 무시하고 넘어가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 경험에서 오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 가던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한번 했다고 더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대신 한 번 더 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그래서 뒤를 돌아 점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것도 모르고 점례는 복대쪽의 권총을 의식하면서 손을 배에 가져갔다. 그것이 헌병의 의심을 샀다.

그가 다시 와서 배쪽을 보면서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순간 점례는 일어나는 반동을 이용해 헌병의 따귀를 갈겼다. 대일본 제국 장교의 아이가 여기 있다고 소리쳤다.

기선을 제압하는 법을 그녀는 유지 호사카에게서 배웠다. 위기를 탈출할 때는 먼저 선공을 날여야 한다는 말을 기억해 내고 현실에서 써먹은 것이다.

그는 기가 죽었다. 얼얼한 얼굴을 달래려는 시도도 없이 죽을 죄를 졌다며 용서를 빌었다. 오빠가 나서서 사람을 제대로 보고 검문하시라고 점잖게 타일렀다.

동생이 흥분한 것은 임신 때문이니 당신이 이해하고 얼른 용의자 색출을 마무리 지으라고 충고했다. 몸에 벤 군인정신을 가진 그 헌병은 그것을 상관의 명령으로 알고 따랐다.

네게 일어난 이 일이 행운일까, 불행일까. 점례는 유지 장교가 차에서 읽으라고 준 반 고흐가 동생 테오와 지인들에게 보낸 글을 읽기 시작했다.

오빠는 자신이 지금 목격한 그 광경에 기가 막혀 자신이 따귀를 맞은 듯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