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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3:17 (금)
서로의 눈을 보면서 자제력을 지키자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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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눈을 보면서 자제력을 지키자고 약속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28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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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의사를 보자 그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갔다. 매우 바쁜 듯한 표정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은 하던 일을 마저 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한 듯 싶었다. 그도 병사들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졸여 맨 배꼽 부근의 버클이 말수의 옆을 지나갈 때 반짝거렸다.

말수는 그의 태도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방금 전에 함장을 만났다는 사실은 벌써 잊었다. 그래서 불쾌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랄 일도 아니지 않은가.

입장이 난처하지도 않았고 무시당했다는 생각도 없었다. 다치고 피가 나지 않은 상황에서 의사의 존재는 멀리 있었다. 더구나 딱히 그가 와서 대화를 한다고 해도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 잘해 보자거나 부상병을 임시 치료할 병상이 있는지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눌 정도였다. 그러면서 군함의 최종 목적지에 대해 알아내면 좋은 일이다.

필리핀이 아니어도 나쁠 게 없다. 지금보다 더 크고 허술하고 육지로 나갈 기회가 많은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 없었다. 전투가 격렬해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

비상 사이렌이 이런 말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미쳐 피할 공간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포탄은 군함 밖 수 백 미처 앞에서 펑펑 터지고 있었다.

함포 사격인지 공중에서 퍼붓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고개를 숙이고 갑판 아래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쪽으로 달리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전투기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공중 폭격은 아니라는데 안심했다. 아무래도 비행기 폭격은 명중률이 높고 치명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쪽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사이렌 소리는 더 커졌고 반격하기 위한 부대의 움직임을 그야말로 일사분란했다.

잘 훈련 된 부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멋진 연출이었다. 용희를 아래쪽으로 가라고 밀쳐 놓고는 말수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병사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잘 한 결정이었다. 포를 맞으면 아무래도 이쪽보다는 아래쪽이 더 안전했다. 침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말수의 눈이 호기심으로 더 커졌다. 몸은 긴장 때문에 쪼그라들었다.

가까이여서 이런 전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포 소리는 많이 들었어도 직접 떨어져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은 장관이었다. 거리를 재고 포신에 포를 채운 병사들이 여러 구호와 몸짓에 이어 반격을 시작했다.

엄청난 괴성과 함께 탄피가 벼락처럼 쏟아졌다. 마른하늘에 치는 날벼락보다 더 심하고 끔찍했다. 생각보다 소리도 엄청나게 컸다.

무언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병사들의 몸에서 나는 탄약 냄새였다. 전쟁의 공포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었다. 이곳은 병상과는 달랐다.

실려 오는 환자들의 치명적인 상처를 보고도 견뎌냈던 그였기에 포사격의 위력은 색다른 고통이었다. 저 정도라면 맞고 견기기 힘들 것이다.

방금 본 위력 때문에 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굉장한 것을 구경하는데 오는 떨리는 몸을 겨우 견뎌냈다.

철로 된 간판도 뚫고 나가 마침내 거대한 군함이 침목한다. 군함들이 모조리 격침되는 그런 순간이 오면 어쩌나 말수는 먼저 그것이 걱정됐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로는 자신과는 그것이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가 이기든 자신은 곧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탈출하겠다는 그의 마음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쟁에 길들여 지기보다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았다. 어서 빠져 나가 좀 더 자유롭게 무언가를 펼치고 싶다는 생각에 말수는 전쟁이 주는 무서운 굉음을 이겨냈다. 여기서 살아나면 영원히 살 것 같았다.

군함은 적의 직접 타격을 받지 않았다. 계단아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용희가 말수처럼 고개를 내밀기 위해 발을 한 발 위로 올려놓았다.

말수는 그런 용희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으나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죽는다고 호되게 나무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운명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수는 이곳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터였다. 달려오는 군대도 없고 맞서야 할 적도 없는데 굳이 갑판아래서 질려 있을 필요가 있을까. 비에 젖은 생쥐처럼 바들바들 떤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용희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용희는 말수의 관대함과 자신의 이런 판단에도 몸을 다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고 그녀 스스로 판단했다. 너무 움츠릴 필요도 그렇다고 심각하게 진지할 이유도 없었다. 여자라고 비켜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포를 맞아 침몰하는 것도 피해서 무사히 가던 목적지에 정박하는 것도 말수나 용희의 바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것은 순전히 운에 맞길 따름이다. 용희가 이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는 볼 수 있는 눈만 내밀고는 간판의 상황을 주시했다.

담장 넘어로 동휴인지 휴의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몸을 숨기는 그런 행동이었다. 두근 거리는 심장은 마찬가지였으나 계단 손잡이를 잡고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달랐다.

군함이 흔들렸다. 포탄을 맞았는지 거센 파도에 밀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순간 멀미가 오면 어쩌나 걱정했다. 포탄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멀미였다.

전쟁은 그들 뿐만아니라 용희의 몸 속에도 깊숙이 박혀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그런 기미는 없다. 병사들은 포사격을 멈추고 낮은 자세로 몸을 엎드린 채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서로에게 몸 상태를 보였고 아직은 총을 맞지 않았다는 안도의 모습이 얼굴에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떨고 있었다. 살아 있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감동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을 병사들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생명은 잠시 유예된 것일뿐 길고 오래가지 않을 것을 짐작했다. 사실이 그랬다. 자신들이 짓밟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잠시 후에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모여있는 그들 사이를 지배했다.

서로의 눈을 보면서 자제력을 상실하지 말자고 다짐했으나 서서히 죽어가는 무방비 상태의 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아침을 볼 수 있을까. 그들은 탄피를 정리할 생각도 없이 또다시 기약 없는 대기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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