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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6:02 (금)
새장을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이 그들 사이에서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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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을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이 그들 사이에서 꿈틀거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24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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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희는 아래쪽 막사로 내려가 집합해 있는 여자들의 성병 유무를 확인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월례 행사였다. 용희는 그것이 싫은지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서 아침부터 서둘렀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담담하게 설명했다.

병이 있어서 좋아하기도 하고 없어서 다행이라고 여기기도 했기 때문에 용희는 표정에 변화를 주지 않고 괜찮다거나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병에 걸려 그것을 핑계로 하루 이틀 쉬고 싶은 경우 되레 약을 받아들고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 것은 조장 언니였다. 그녀는 지긋지긋하다고 용희에게 투덜댔다.

이대로 가면 무언가 일을 저지를지 몰라 걱정했는데 결과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런 언니가 오래 버텨 주기를 용희는 바랐다.

힘들어도 주변을 챙기는 그녀는 여자들의 언니였다. 처음에 어떤 상황인지 몰라 허둥대고 있을 때 자신에게 삶의 용기를 준 것도 조장 언니였다.

그래서 용희는 그녀가 더 딱해 보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자신도 언니 신세였다는 사실에 영희는 몸서리쳤다. 빨리 끝나야 한다.

전쟁이 끝나야 가부간 결정 날 것이다. 군인들이 싸울 일이 없다면 자신들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용희는 여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희는 곧 그런 날이 온다고 그러니 조금만 더 참자고 다독였다. 다른 도리가 없기에 여자들은 그러자고 서로 손을 잡았다.

그러나 더 참을 수 없는 여자들도 나왔다. 그들의 일부는 삼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병균이 몸의 깊숙한 곳에까지 들어가 그냥 놔두면 생명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용희는 그런 여자들에게 항생제를 주는 것 외에 다른 처치를 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여유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럿이 나눠 써야 하니 치료에 필요한 적정량은 늘 부족했다.

조장 언니와 마주 섰을 때 용희는 시선을 일부러 피했다. 그녀는 벌써 두 번 째 낙태를 해서 만신창이 상태였다. 그러나 표 내지 않았고 늘 웃었으며 다 산 사람처럼 여유와 체념을 달고 살았다.

‘언니, 곧 좋아질 거야.’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용희나 듣는 조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 그날 오후, 검진에서 특이점은 없다며 용희는 의사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그는 심심하면 자신이 직접 나서기도 했으나 용희와 함께하면서는 그 일을 용희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그것 역시 호의라는 듯이 그는 그렇게 지시한 것에 대해 만족감을 나타냈다.

니들 끼리는 서로 통하니 가서 기운을 복돋아 주라고 말했다. 용희도 그렇다고 인정했다. 남자의 진료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은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그런 일 하나하나에도 일본인 의사는 자신은 베푸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밴 인도주의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늘 인도주의를 내세웠으며 그것은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도 했다.

강제가 아닌 존경심으로 정복하겠다는 의사의 내심을 용희는 알고 있었다. 설사 그가 그런 의도를 보이지 않았어도 저절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에게 가능하면 호통칠 기회를 주지 않아 그가 말하는 인도주의가 실천되기를 기대했다. 공손한 그녀에게 의사는 언제나 자신의 권위가 현장을 압도하고 있는 사실에 만족했다.

차트를 뒤적이며 한 귀로 듣는 시늉을 하던 의사는 필리핀행 군함에 타지 않겠느냐고 그녀의 의중을 물었다. 느닷없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용희는 잠시 얼어붙은 듯 말을 하지 못했다. 의사의 말은 그것이 권유라 할지라도 명령이었다. 뜬금없다는 듯이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의로 대답할 시간을 늦추었다. 기다리는 것을 얻었다는 만족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의사는 자신이 준 것이 상대가 좋아하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이 되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

‘이동하면서 좀 쉬어. 그동안 고생했어.’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시늉을 내면서 말 대신 표정으로 정말 고맙지만 왜냐고 물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여기 생활이 만족까지는 아니어도 정착돼가고 있어 잠시 탈출의 생각을 순간순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용희는 멍한 상태를 유지한채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의사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 일은 어떻하고요? 의사가 부연 설명을 하지 않자 용희는 더는 망설일 수 없어 이렇게 질문 형식으로 난처함을 드러냈다.

많은 환자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그것은 말수가 한 말과 같은 변명이었다. 둘은 기회가 오면 일을 우선으로 내세우고 떠나는 것을 고맙기는 하지만 거부하는 것으로 하자고 미리 서로에게 다짐을 한 상태였다.

의심을 사지 않고 빠져나가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던 것이다. 인원이 충원된 것도 아니고 환자가 준 것도 아닌데 급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은 빠지고 싶다고 했다.

천연스러운 말에 용희는 순간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자신을 그가 알아채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쌓였다. 이때만 해도 용희는 말수가 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말수 혼자서는 부족하다는 말을 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말수와 동행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련이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용희는 실감하지 않았다.

의사는 이동 중에 군함이 간혹 적의 폭격을 받는 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흔치 않았으나 근래 들어 더욱 빈번해 졌는데 우리가 수세에 밀려서라기보다는 단지 적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의사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폭격에 대비해 숙련된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 갑판 위의 쓰러진 병사들을 급한 대로 돌봐야 하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 했다.

의무병만으로는 안됐다. 숙련된 민간인 의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폭탄이 떨어지는 갑판 위에서 부상병을 돕는 일은 총을 잡고 돌격 앞으로를 하는 병사들처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지난번 유능한 의사 둘을 한꺼번에 잃은 사건에 대해 책임자였던 이곳 의사는 질책을 받았다. 그래서 다치거나 죽어도 타격을 덜 입을 수 있는 조선인을 선택했다.

조선인의 죽음에 대해 질책을 받을 일은 없다. 그가 호의를 베푼 것은 이런 이유도 있었다. 의사는 뒷걸음질 칠 생각 말고 앞으로 씩씩하게 나가라고 조언했다. 그 앞에서 싫어하는 내색을 할 수 는 없었다.

그즈음 광산에서는 폭동의 조짐이 일었다. 인부들의 일은 고되고 다치고 죽는 일은 허다했다. 그러나 먹고 자는 것은 짐승과 다름없었다.

노예 생활도 이처럼 처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수는 그 자신이 그것을 보고 직접 겪었기 때문에 참상을 안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수술칼 대신 곡괭이 자루를 쥐고 있었다면 폭동은 벌써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전쟁이 심해지면서 군수품은 물론 식량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조선인 노무자들에게 돌아가는 배급은 열악했다. 뼈만 앙상한 몸으로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자포자기 심정에 빠졌다.

말수는 그런 낌새를 그들의 숨기는 듯한 눈초리에서 감지했다. 폭동이 일어나면 조선인인 말수도 힘들어진다. 비록 그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그가 사건에 대해 사전에 몰랐다면 의심을 받을 것이다.

말수는 그것에 대비해 조선인들의 처우에 대해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폭동까지는 아니어도 일본인을 해치거나 도주하면 전투력 손실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자 의사는 네가 그 일에 나서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며 그들의 일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조선인들은 너무 욕심이 과하다고 했다. 나중에 고향에 들어가면 수북한 군표로 부자가 되지 않으냐고 따지듯이 묻기도 했다.

말수는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 미리 보고했으니 나중에 일이 벌어져도 책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배를 타기 전에 폭동이 실제로 발생하면 어떤 사태로 발전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하는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전쟁은 더 심해지고 있다. 의사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전투보다는 부상병 치료가 우리의 책무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늘 한 쪽 귀는 다른 쪽에 열어 두고 있었다.

부상병을 통해 전황을 짐작하고 스스로 판단하기도 하면서 전쟁이 어느 쪽에 유리한지를 가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도 안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즈 대신 총을 집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을 그는 두려워했다. 새장을 벗어나려는 본능은 말수나 용희나 의사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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