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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희는 쓰임새가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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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희는 쓰임새가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22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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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실습한 적이 있다는 의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 여자를 상대로 한 번이 아닌 두 번의 낙태를 감행했다. 그중 한 명은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다음번 여자는 죽다 살아났다. 다행이 목숨을 건진 그녀는 그들이 보기에도 딱했던지 열흘 간 군인들의 접촉 금지 대상이 됐다.

살아난 그녀가 바로 조장이었다. 용희도 그 사실을 이리저리 주워들은 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수는 용희에게 처음으로 들었다. 늦은 밤 잠깐 쉬고 있던 용희에게 말수가 다가왔다.

‘일본인 의사에게 말했다. 바로 내일이라도 하자고 하더라.’

너만 괜찮다면 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용희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 의사의 수술 성공확률이 절반이라고 말했다.

말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한 귀로 흘려듣고는 어쨌든 네 배가 불러오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여기에 용희가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을 낼 생각은 없었다. 자신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 아기는 꿈도 꿔본 적이 없다. 다행인 것은 그가 두 번째는 성공했고 자신이 세 번째이니 어렵지 않게 끝날 것을 믿었다.

말수는 가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마취제 한 병을 따로 챙겨 용희에게 주었다.

‘의사가 마취도 안 할 거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 병상에서 이것 구하기 힘들어.’

본국에서 들어오는 양도 적고 설사 있다고 해도 그런 작은 일을 하는데 그렇게 귀한 약을 처방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용희도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작은 일이라는 말수의 말은 용희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아플 때 써.’

말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면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간이침대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생각보다 쉬웠다. 의사는 거침없었고 용희는 어떤 일이 생겼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상처만 입었다.

그녀는 하루를 쉰 다음 바로 간호 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자신을 대하던 의사의 태도가 바뀌었다. 힐끔힐끔 보는 눈이 대놓고 유혹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면서 용희는 말수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언짢은 기분을 주어서는 득 될 게 없다. 사로잡힌 그의 욕망을 풀어줘서 안 될 것도 없었다. 용희는 너만 괜찮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수시로 의사에게 불려갔다. 그러나 그가 재촉하지 않는 한 먼저 나서지는 않았다. 부탁을 들어준다는 자신의 선심을 그가 받도록 한 것은 자신에게 그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도 이렇게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여자는 없다는 투로 용희를 칭찬했다. 충분히 즐긴 그는 만족감을 표시하기 위해 용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처음에 용희는 없다고 잘라 뗐다. 불쑥 말했다가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의심 많은 자를 안심시키려면 부탁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설사 하더라도 그 일로 인해 자신이 이득 받는 것이 없다는 점을 그 스스로가 알도록 해야 한다. 또 그 일은 위험하고 힘들며 고단한 것이어서 궂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 의사를 따돌릴 수 있다.

그녀는 긴히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말하겠다며 그때는 부탁을 들어달라고 웃었다. 일본인 의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거절하지 않겠다면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 마땅히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태도였다. 용희는 거부했다. 돈으로 움직이는 여자라는 인상을 그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여기서 돈은 쓸 곳도 없다.

잘 못 보관하면 잃어버릴 수도 있고 누가 훔쳐 간 든 잡을 수도 없다. 용희는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조용히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자신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에 조금 화난 표정의 의사는 용희의 진심을 알고는 그녀를 더욱 신뢰했다.

그는 돈을 집어넣고 대신 전표 책을 가져오더니 수술 때문에 하루 쉬었던 그 날에도 일한 걸로 기록했다. 그 기록은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받을 돈의 목록이었다.

그러나 용희는 그런 것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로 가야 돈이 쓸모가 있는 것이지 여기에 갇혀 있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휴지에 불과한 것에 용희는 집착하지 않았다.

용희의 간호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이제는 간호를 넘어 외과 의사를 해도 될 정도였다. 웬만한 내과적 처지도 의사의 지시 없이 쓱쓱 해냈다.

시장바닥 같은 병상을 이리저리 뛰듯이 옮겨 다니는 용희를 눈 여겨 본 일본인 의사는 전쟁이 끝나면 데려가서 조수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조선인들이 무식하고 게으르다는 말은 다는 맞지 않는다고 의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 팔을 다쳐 온 병사가 간호사를 불렀다. 막 진통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쪽으로 가려는데 광산에서 다리가 부러진 조선인의 신음이 높이 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아우성쳤다.

전쟁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이다. 진짜 그렇다. 이보다 더 그런 곳이 없다. 용희는 날마다 진저리쳤다. 그런데도 언젠가부터 그런 것이 싫기보다는 되레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삶의 활력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부르는 환자에게 용희는 쓰임새가 있는 스스로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용희는 일본인 병사에게로 가던 몸을 돌려 조선인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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