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의가 점례와 가까워 지지만 않았어도 동휴가 자신에게 신경질 낼 일은 없었겠지.
그러기 전까지 동휴와 나는 그런데로 잘 맞았어. 부모님의 성화가 아니었어도 우리들은 다음해 쯤 결혼했을지도 몰랐어. 안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더 잘 해 줄 걸.'
용희는 동휴에게 미안했다. 자신의 의사와는 달랐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렇게 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 와 있는 나를 동휴가 되레 미안해 해야한다. 그러나 그것도 어이 없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묘하다. 한치만 보았어도 나는 이런 곳에서 이런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희는 한숨을 쉬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이란 유치해. 정말 유치해 눈 뜨고 볼 수 없어. 혼잣말로 자신을 위로하는 용희는 한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그렇다고 괜찮아, 괜찮아 최면을 걸며 아무리 위로해 봤자 스스로 위로는 위로가 돼 주지 못했다. 대신 끊어진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동휴가 둘도 없는 친구의 여자 점례를 넘본다. 점례는 그런 동휴의 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내색을 숨긴다.
다가오는 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점례는 휴의를 좋아했고 휴의 역시 점례를 좋아했으니 점례의 마음을, 휴의의 마음을 이해한다.
나는 평생 남만 이해하다 인생 종치겠다. 용희는 나는 외톨이였고 외톨이였다고 되 내었다. 시골 죽 마을에서도 그렇고 여기 와서도 그렇다.
마음 둘 곳이 없다. 그러다가 말수가 나타났다. 그가 씩씩거리면서 쌍욕을 해대도 이제는 말수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
버티는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말수 때문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런데도 마음 구석 한편에는 동휴의 듬직한 등이 떠오른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각인과도 같은 것이다. 나를 등에 업고 그가 달려갈 때 몸은 물론 마음 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온기를 느낀 것은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였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자 넓은 등에서 퍼졌던 따뜻함이 이불속보다 더 훈훈했다. 용희는 웃었다. 떠나 올 때 그가 준 부적은 무슨 의미일까. 기다릴 테니 날 잊지 말라는 표식일까.
용희는 성경 사이에서 언제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부적과 동휴를 떠올렸다. 용희는 편지를 썼다. 부칠 수 없는 편지였지만 글자를 쓰고 나면 한동안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읽고 또 읽고 고치다 보면 점례에게 다가갔던 동휴도 용서할 수 있었다. 더구나 부적은 점례가 아닌 자신에게 주었다. 그것은 사랑의 징표였다.
‘네 목소리가 들려, 네 얼굴도 보여. 잊지 않을게.’
용희는 사랑을 잃은 여인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여기 와서 흘렸던 숱한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용희는 앞치마 끝을 잡아올려 눈물을 닦았다.
자신을 능욕했던 사람들을 저주할 용기도 사라졌다. 고향 일은 고향 일이다. 여기 일이나 신경 쓰자.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 일을 겪고 나서 동휴와 다시 만나는 것은 용희 자신이 용납하기 어렵다. 설사 동휴가 다른 마음으로 자신을 끌어들인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용희는 그런 다짐을 하면서 일의 진척이 더딘 것을 말수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를 믿었다. 성경을 믿었고 부적에 의지했다. 동휴를 지워졌다고 해도 부적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부적이 동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되레 그 반대였는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의지할 것으로 부적을 품은 것은 용희가 기대고 싶은 언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닥쳐오는 불안감 속에 즐거운 평화를 용희는 느꼈다. 쓴 글을 띄엄띄엄 읽다 용희는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얼른 편지를 감추었다. 말수였다.
몸의 상처는 다 나았는지 어깨에 걸친 끈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얼굴은 더 검어졌고 눈은 깊어졌다. 그는 용희가 몸을 뒤로 하고 자세를 가다듬을 동안 그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
용희가 돌아앉았다. 서로는 서로를 그렸다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말이 없고 움직임도 없었다. 오지 않는 동안 말수는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광산이 또 무너져 내렸다. 조선인 8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13명이 부상 당했다. 인원 투입을 조정하던 말수는 이번에도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다음 날에도 사고가 터졌다. 이번에는 일의 진척 사항을 보러 왔던 일본군 하사가 다쳤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을 들쳐 업고 밖으로 나왔다.
피투성이 그를 말수는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맸다. 그 전에 부러진 팔을 맞췄다. 말수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고 그 하사는 고통 속에서도 말수의 침착하고 노련한 치료를 눈여겨봤다.
‘너 조선에서 의사였니.’
그가 물었다. 여러 번 조선인을 치료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말수는 못 들은 척하면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궁리했다.
하사가 질문을 잊었는지 자신의 얼굴을 찡그리고 상처를 내려 보는데 시간을 허비하자 말수는 준비한 답을 내놨다.
‘아버지가 한의사였어요.’
그는 눈대중으로 심부름을 하면서 침도 놓고 다친 환자들을 꿰매는 일을 도왔다고 했다. 다음날 말수는 진짜 일본인 의사에게 불려갔다. 그렇지 않아도 의사가 부족한데 네가 대신 도와달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는 항생제 진통제 주사제 등의 목록과 사용량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의사에게도 조수가 필요했고 어려운 것은 그에게 떠넘길 요량으로 일본 의사는 말수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십장에서 졸지에 의사가 된 말수는 막사 옆 간이 병원에서 다음날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고쳐도 일을 하기 어렵거나 위태로운 환자는 뒷전으로 밀어놓았다. 일본군 위주로 치료 했고 일하다 다친 가벼운 부상자가 그 다음 순이었다.
밀려드는 환자 때문에 말수는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광부일 보다 의사 일이 더 바빳다. 생존은 더 보장됐으나 하루는 짧았다. 저녁에도 불려나가기 일쑤였다.
용희가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말수는 가지 못하는 심정에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무릎을 쳤다.
조선 여자 하나가 인천에서 간호사 일을 했는데 여기로 데려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마침 결핵으로 괴로워하던 고급 장교 하나가 여자라는 말에 눈을 번뜩이더니 당장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말수는 달렸다.
임시방편으로 가져온 붕대를 시험 삼아 용희에게 간호사 수업을 시켰다. 묶고 풀기를 반복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주사기를 꺼내 자신의 팔에 찌르는 연습을 시켰다.
덜덜 떨면서 용희는 그가 하는 데로 따라했다. 묶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됐다. 문제는 주사였다. 좀처럼 핏줄을 찾아 정확히 찌르기 어려웠다. 말수가 말했다.
‘떨지마. 그러면 여기서 못나가.’
그러면서 말수는 평생 이곳에서 갇혀 살고 싶으면 그렇게 계속 떨라고 협박했다. 권총을 받아 들었을 때보다도 용희는 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다가 해보자는 심정으로 퍼렇게 솟은 말수의 힘줄을 찾아 찔러넣고 포를 뜨듯이 그것을 위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주사기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됐다.’
짧은 말수의 말에 용희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문을 열 때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탈출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쫓아오는 적을 해칠 권총은 필요없다.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군함을 타고 이 섬을 빠져나가리라. 간호복을 입은 용희는 많은 수련을 쌓은 사람처럼 자신감이 넘쳐났다. 찢어진 상처, 부러진 팔다리를 보고도 용희는 놀라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런 잔인함이 있고 침착함이 있고 칼로 살을 찢고 바늘로 꿰매는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재주가 있다는 것을 용희는 반갑게 받아들였다. 용희는 숙련된 간호사였다.
일본군은 경성제대를 막 입학하고 온 조선 의사 말수와 인천에서 간호사 일을 한 경험이 있는 노련한 간호사 용희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들은 그런 일본군을 세심하게 치료했고 그들의 행동을 소상하게 관찰했다.
그 즈음 용희는 식욕이 왕성해졌다. 그러나 밥걱정은 없었다. 임시 병원에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다. 고기도 있고 간혹 열대 과일 같은 것이 남양척식주식회사 이름을 달고 상자째 들어오기도 했다.
밥보다 과일이 더 맛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은 용희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이 용희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배가 불러온다는 느낌이 들 때 달마다 있던 것이 석 달째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재앙이다. 그녀는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상의할 대상은 말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애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말수는 어떻게 그것을 지우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더 크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터지고 갈라지고 뭉개진 외상은 어느 정도 해볼 만했으나 속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일본 의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전투력의 상실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임신 사실을 알리기 전에 먼저 한 것은 말수의 치밀한 계획의 결과였다. 일본군 의사는 그런 일은 자신도 해본 적은 없지만 한 번 실습한 적이 있다면서 해보자고 했다.
‘죽기밖에 더하겠니.’
그는 어두운 표정의 말수에게 대수롭지 않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죽기밖에 더하겠어. 말수는 그 말을 속으로 따라 하면서 이제 곧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