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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희는 자신을 지켜준 것을 꺼내 가슴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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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희는 자신을 지켜준 것을 꺼내 가슴에 안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20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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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용희는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올 때가 됐는데 오지 않는다면 다쳤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용희는 주저앉고 싶은 그런 생각을 떨쳐 내야한다. 그러나 좀처럼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용희는 말수가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 그가 없으면 도무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남자이기 전에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여기서 살아가는 법, 생활하는 법을 배웠다. 그에게 끌려가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에 용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소에 매단 쟁기처럼 자신은 그가 가는데로 가야한다. 여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쥐고 있다. 그는 나를 끌고 갈 힘이 있다.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용희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어느 연기가 자기 집의 굴뚝에서 나는 연기인지 알아 맞출 수 있었다. 눈설미 하나는 타고난 용희였다.

그래서 인지 그는 사람보는 눈을 가졌고 그 사람과 자신을 맞출 수 있었다. 말수는 거칠었지만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했던 오래 감출 수 없다는 말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오래가 얼마의 시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짧은 시간은 아니다. 용희는 들킬 것 같은 불안에 떠밀려 이리저리 해매는 자신의 꼴이 미웠다.

그는 바쁠 것이다. 나의 시간을 그에게 주고 싶다. 하찮은 내 인생은 이제 그의 것이다. 그런 생각을 벗어날 수 없자 그가 오지 않는 날은 군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던 시간보다 더 불안했다.

성경책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일도 없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한시도 견딜 수 없다.

그러면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시골 성당에서 보았던 예수를 떠올렸다. 나무에 매달려 못 박혀 죽은 그의 고통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예수 대신 말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하느님보다 더 오랫동안 용희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다정한 속삭임, 탈출하자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냉큼 손을 잡았다. 

'어서 가자.'

그의 억센 모습에 하느님 아버지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렸다. 내민 손을 잡고 뒷문을 통해 다급히 숲으로 들로 마구 달려나가는 상상은 꼬리를 물었다.

‘서라 움직이면 쏜다.’

외치면서 거총 자세를 하는 병사들의 목소리는 무시했다. 애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태도로 말수는 잡은 용희의 손을 놓치 않고 더 빨리 달렸다.

용희는 뒤지지 않았다. 달리기라면 자다 말고 일어나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적의 눈을 피해 구덩이처럼 생긴 참호 속에 몸을 숨겼다.

참호안은 방금 군인들이 떠났는지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용희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철거덕 거리는 긴 칼의 움직임 소리에 말수를 다그쳤다.

‘지체할 시간 없어요.’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기 위해 입을 벌리고 씩씩거리던 말수는 조금 더 쉬었다 갔으면 하는 간절한 눈빛을 용희에게 보냈다. 지금 막 들어왔는데 벌써 나가자고 재촉하는 용희가 야속하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용희는 지금 나가지 않으면 내리치는 칼 날을 피할 수 없다며 먼저 참호를 박차고 밖으로 밖으로 뛰어 나왔다. 생각은 여기서 그쳤다.

뒷간에서 부르는 은근한 조선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용희야, 놀자.’

용희가 문을 열고 내다봤다. 눈부신 빛 서너 줄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용희는 그것을 피하는 시늉으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무슨 용무냐고 물었다.

‘바다 가자.’

막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오후의 햇볕을 피해 반대편에 모여있던 여자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용희는 지금껏 해변을 본 적이 없었다. 여기 와서 ‘용희의 집’이라는 문패가 걸린 자기 방과 이곳 뒤쪽이 그녀가 본 남양군도의 전부였다.

그리고 막사 밖에 해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걸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고향이 더 그리울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뛰어놀던 점례와 동휴 그리고 휴의.

하지만 그녀는 동료들의 제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일본군은 일이 없을 때는 혼자서가 아니라면 잠깐씩 해변에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견디지 못하고 여자 둘이 자진하고 나서였다.

그들은 죽은 그녀들이 왜 그랬는지 몰라 답답해 죽을 지경이라며 그녀들을 상대로 질문을 했고 해결책으로 산책을 내놨다. 여자의 죽음은 전투력의 상실이었고 일본군은 그걸 막을 수 있다면 이 정도의 호의는 베풀 수 있다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막사를 끼고 돌아 비탈길을 내려갔다. 한 명이 앞장을 섰는데 그녀는 이번이 세 번째라고 했다. 가는 길이 익숙한지 발걸음이 가뿐했다.

‘여기 오면 숨통의 띄여.’

그녀는 말하면서 앞쪽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용희는 숲 사이로 보이는 파란 물결을 보았다. 그 전에 가볍게 해변을 때리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바다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바다가, 진짜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 순간 뱃멀미의 기억은 사라졌다.

일본군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가가 손에 물에 댔다. 온기가 느껴졌다. 강한 태양 아래 물은 데워졌고 빛을 받은 바다는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눈에 훤히 보이는 속살은 조용했고 아늑했으며 끝을 모른 심연처럼 깊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백사장은 길었다. 죽마을의 백사장보다 길었다. 모래는 흰색이었고 그것들은 쌓여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수평선 저쪽에 커다란 군함이 떠있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저렇게 큰 배는 처음 본다. 앞으로 뻗은 포신이 이쪽을 향해 사격을 할지도 모른다.

그때 섬의 저쪽 너머에서 진짜로 포성이 들렸다. 요즘 들어 더 빈번한 함포 사격은 용희의 심기를 건드렸다. 전에는 밤에 울렸으나 요즘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같이 온 여자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종아리가 잠길 정도까지 바다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들은 뒤를 돌아보며 용희에게 너도 들어오라며 깔깔거렸다.

신발을 벗어 손에 든 용희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물이 발가락 사이로 흘러들었다. 이 기분을 안다. 용희는 모래에 닿는 발가락의 느낌과 물에 닿는 느낌을 구분할 줄 알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녀는 이곳은 꿈에 본 천국이 아닐까 여겼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성경속의 지상낙원은 바로 이곳이다. 그녀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이곳이며 하느님이 벌을 주고 추방한 곳도 이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푸는 바다는 끝이 없이 펼쳐졌고 잔잔한 파도는 종아리에서 멈춰섰다.

용희는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 멈춰서서 발 아래를 굽어 보았다.

‘이곳을 또 와야지.’

용희는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서 오래 머물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음 가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그런 기쁨이 가득차 올랐다. 저쪽에서 물고기들이 뛰어올랐다. 작은 녀석들이다. 하얀 배를 드러내고 곧 물속으로 들어갔다.

앞선 여자들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 저런 웃음소리를 들은 게 얼마 만이냐.

잠시 후 첨벙 첨벙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녀석들이 고개를 내밀고 빠른 속도로 달렸다가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다가 어느 순간 시야에서 멀어졌다.

‘고래다. 돌고래다.’

그녀 속의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다. 돌고래, 용희도 따라 불렀다.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그녀들은 돌고래가 사라진 쪽을 유심히 지켜봤지만 녀석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용희는 이제 가야 할 시간이 아닌가 걱정됐다. 누군가 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다면 당황할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 여자 넷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을 알면 화를 내고 쫓아 올지 몰랐다. 그러나 그 보다도 그 순간에 말수가 자신을 찾아왔을지도 몰랐다.

그런 불안을 눈치챘는지 걱정 마, 삼십 분 정도 허락받았어. 그녀는 손목의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조장 역할을 하면 용희보다 3살 많은 언니였다. 조장은 일본군이 조선 여자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 논 직책이었다. 나이도 많고 활발한 여자 가운데 조장을 선정했다.

여자들은 언니라고 부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조장이라고 불렀다. 조장 언니는 일본군이 준 거라며 손목시계를 들어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자랑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우쭐했다. 웃는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직 10분 남았다. 우리 좀 더 있어도 돼.’

그녀는 조장의 권위로 허락했고 용희는 조금 안심이 됐다. 바다에서 10분은 짧았다. 방안의 그 시간은 뱃머리의 고통처럼 길었지만 발가락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물과 모래가 있는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10분간의 휴가. 용희는 군인들이 훈련하다 말고 10분간 휴식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언제나 한 시간 가운데 10분간 휴식을 이용한다고 했다. 휴식에만 자신만의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것이 휴식인가. 용희는 파도가 내는 잔잔한 소리와 은빛으로 빛나는 모랫바닥의 감촉을 즐겼다. 이곳은 교회이고 성당이었다. 그곳처럼 평온했다. 성경이었고 예수님 말씀이었다.

그녀의 영혼은 파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바다에서 몸을 돌려 해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용희는 낯선 곳에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용희도 그녀들을 따랐다. 군함이 시선에서 흐려졌다. 용희는 자신이 걸어왔던 막사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해변에서 막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많이 걸어온 것 같지 않은데 이쪽에서 저쪽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감쪽같이 위장한 덕분에 막사는 바다 쪽의 공격을 용케도 피하고 있었다.

‘언니 달리기 시합하자.’

용희는 조장을 보면서 아까 하고 싶었으나 참았던 말을 했다.

'저기 언덕까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그녀가 응했다. 그리고 하나 둘 셋을 외치면서 여자 넷이 막사 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방에 들어와서도 용희는 한동안 바닷속을 헤맸다. 그리고 조용히 성경책을 꺼내 들었다. 책갈피처럼 사용하는 빛바랜 부적이 오늘따라 새롭게 보였다. 그것은 용희가 죽마을을 떠나올 때 동휴가 준 것이었다.

동휴 엄마는 절을 믿었는데 작은 암자의 주지로부터 해마다 초파일에 쌀 한 되를 주고 부적 서너 개를 받아왔다. 용희는 귀신같기도 하고 사람같기도 한 괴물 모양의 짐승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부적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 옆의 붉은 글씨는 글씨인지 낙서인지 몰랐지만 웬지 그것이 지금껏 자신을 지켜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용희는 그것을 책갈피에서 꺼내 가슴에 껴안았다. 동휴가 자신을 등에 업고 모래사장을 달릴 때 전해졌던 따뜻한 온기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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