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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안전 지대까지 안내를 받으며 만주 시내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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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안전 지대까지 안내를 받으며 만주 시내로 들어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1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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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았으나 점례는 해냈다. 몇 번을 지우고 덧입힌 가운데 제법 그럴듯한 삽화를 만들어냈다. 점례는 전과 다름없는 점례였지만 내면은 이미 시멘트 막사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스스로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까지 그 모든 것을 점례는 해내야 하고 해낼 수 있었다. 전황에 대해 장교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례는 근래 들어 심상친 않은 흐름을 느꼈다.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었다. 어젯밤 달무리가 지더니 오늘은 비가 올지 모른다. 고향의 엄마는 늘 하늘을 보면서 내일 날씨를 말했다.

점례는 대충 완성된 삽화를 내두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오기 전에 꽃다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리 항아리에 그것을 가득 넣었다. 그가 좋아할 것이다.

집으로 온 그가 꽃을 보고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점례 역시 입가에 미소가 절로 어렸다. 정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연병장의 병사들은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어린애 같은 호기심이 점례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이제 안정된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별로 흥미롭지 못했다. 그러나 익숙해져 있었는데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것은 처음 만주로 끌려 왔을 때 처럼 같은 처지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름이 돋으면서 사색이 된 점례는 화병의 꽃을 보면서 자신도 꼭 저 신세 같다는 한탄을 했다. 지금은 싱싱하게 웃고 있지만 열 흘도 못돼 시들어 버려질 것 같은 느낌에 점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오랜만의 눈물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왔다. 점례는 교실 문을 나서자 비가 쏟아져 책보를 머리에 이고 운동장을 달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싫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점차 흠뻑 젖어들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옷이 몸에 감기고 빗방울이 머리와 어깨를 때리자 점례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저기로 달려 나가 뛰어볼까. 그렇게 비에 몸을 맡기고 나면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비 맞는 기분이 어떤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 몽상을 하고 있는데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어느 새 장교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상기된 얼굴의 그는 점례에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었고 점례는 소학교 시절 비가 오는데 무작정 뛰어서 집에 온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군인들이 비에 젖어서 훈련을 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했다고 했다. 병사들도 처음에는 싫지만 나중에는 환호할지 누가 알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시선이 꽃병에 머물렀다가 점례에게로 왔다. 그렇다면 그것을 한 번 다시 경험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의 눈빛이 어렸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점심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장교는 전화기를 돌렸다. 그리고 요즘 사기와 군기가 빠졌다고 냅다 호통을 쳤다. 그리고 병사들을 지금 즉시 집합시켜 각개 훈련에 돌입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군인들이 완전군장을 한 모습으로 열을 지어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가득 차서 언제 텅 비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명령을 끝낸 장교는 점례를 보더니 살짝 웃었다. 이제 됐으니 구경하는 일만 남았다는 투였다. 장교는 점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연병장이 아닌 뒷산으로 끌었다.

둘은 허겁지겁 산을 올랐다. 점례는 무서웠다. 그의 한 마디에 수많은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놀라웠다. 익숙한 곳을 찾아가는 듯이 장교는 잡은 점례의 손에 힘을 주면서 거침없이 위로 끌고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억수로 쏟아지고 있는데 산으로 가는 길이 불길했다. 한참을 가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바위에서 뒤를 돌아보자 연병장이 저 멀리서 보였다.

그리고 우렁찬 구령 소리에 맞춰 대열을 맞추느라 군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비는 멈추지 않고 더 쏟아졌다. 하지만 흰 구름이 동쪽에서 다시 서쪽으로 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췄다. 구름이 저 아래서 헤쳐모여 하는 병사들처럼 이리저리 떠다녔다.

장교는 구경 잘 했느냐고 점례를 향해 묻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작은 구멍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장교의 등 뒤로 환호는 병사들의 구령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병사들은 비를 맞고 승리의 고함을 치고 있었다. 점례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동굴 속에 들어간 장교는 동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들어오기 전에 환호하는 장교들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그는 점례가 고마웠다. 사기를 올려준 점례를 위해 그가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그는 이 동굴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 대신 불부터 피웠다. 이곳을 여러 차례 온 듯이 행동이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안은 군인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지난겨울에 다 쓰지 못한 장작이 있었고 타다 만 숯도 그대로 있었다. 비에 젖어 추위에 떨던 점례는 불 앞에 앉자 몸 전체로 빠르게 온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장교의 눈이 잠깐 번개처럼 번쩍이더니 점례를 잡아끌었다. 하려고 했던 것을 실행에 옮기려는 태도였다. 그를 제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점례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비에 젖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불쾌한 감정을 그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삼십 분쯤 후 그들은 동굴 밖으로 나왔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고 구름 사이에서 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길 사이로 꺾인 진달래 가지를 보고 장교가 말했다.

‘꽃병 속의 꽃이 여기서 나온 것이냐.’

점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교는 내려가다 말고 비에 젖은 꽃잎을 만졌다. 그리고 점례를 돌아봤다. 점례는 진달래꽃은 따서 먹어도 된다고 했다.

미심쩍어 하는 그를 대신해 점례가 먼저 여러 개를 따서 한 잎에 넣고 씹었다. 장교도 따라했다. 이것을 말려서는 차로 마시거나 술로 만들어 먹는다고도 했다. 그러냐고 장교가 관심을 가졌다. 비가 그친 주변은 그야말로 환상적 풍경을 자아냈다.

안개까지 사라지자 온통 붉은 꽃밭이었다. 붉은 것 위에 영롱한 물기가 아롱거렸다. 아름다운 늦봄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전쟁터라니 점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장교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점례는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장교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 감탄에 빠진 점례를 남겨두고는 이런 놀이를 할 때가 아니라는 듯 서둘렀다. 점례도 뒤질세라 그 뒤를 따라 달리듯이 내려왔다.

그날 저녁 장교는 점례에게 내일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손에는 점례가 스케치한 그림이 들려있었다.

‘좋아, 내가 사람 볼 줄을 알아.’

장교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모든 그림에는 목적이 있어. 전쟁처럼.’

일장기와 욱일기, 그리고 착검한 총을 세우고 양쪽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이 직사각형의 도화지에 알맞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풀지 않고 장교는 다른 그림을 집어 들었다.

막사와 막사 높이와 나란히 핀 진달래와 바닥의 민들레, 노란 꽃 위에 앉은 검고 푸른 커다란 나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두 남녀.

‘이건 나고 이건 너지.’

장교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묻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한다는 듯이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점례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기다렸다.

군인의 눈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장교는 말했다. 선생님이 잘못을 지적할 때 느끼는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연필 가져와.'

그는 점례가 가져온 연필을 대검을 꺼내 조심스럽게 깎아 나갔다. 날이 바짝 선 검은 천천히 움직였다.

'이 부분은 세밀화처럼 정밀하게 여러번 칠해야 해.'

그가 깎은 연필로 나비의 일부에 자신의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좋아요.' 

점례는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곳은 괜찮은지 물었다. 손 볼 곳이 있다면 고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 대신 경성에 가면 찾아야 할 사람과 주소를 적은 쪽지를 건넸다. 혹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외우라고 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장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불리해 졌고 자신은 태평양의 어느 섬으로 배치될지 모른다고 했다. 본국의 아버지가 손을 써 만주에 남으라고 했으나 자신은 직접 전쟁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거절했다는 말도 했다.

‘네가 싫증 난 것 아냐. 되레 그 반대야. 널 지키고 싶어.’

그는 그날 밤 거의 자지 않고 자신의 일본 대학 시절과 정치인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조선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 앞으로 벌어질 세계 질서에 대해 믿고 끝도 없는 말을 해댔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점례는 그가 정신적 혼돈을 겪고 있다고 판단했다. 21살 앳된 그가 처음으로 불쌍하다고 점례는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의 일부를 점례는 받아들였다. 군복을 입고 각세운 그가 허물어진 성곽처럼 처량했다. 마음속으로 점례는 그와 영혼의 교류를 갈망했다. 떠나 있어도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할 존재를 위해 점례는 지금까지 있었던 크고 사소한 일에 대한 경멸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가 나를 놓아주려고 한다. 너무나 비현실적 세계에서 살다가 갑자기 풀려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자유가 주어졌지만 주인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머슴의 막막한 심정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러나 그녀는 한때 꿈꿔 왔던 탈출의 순간이 저절로 왔다는 기쁨에 몸이 들떴다. 죽마을을 떠나올 때 그 점례가 지금 점례는 아니었다. 그런 마음으로 점례는 장교와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안전한 지대까지 군인의 안내를 받으며 만주 시내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장교가 준 고흐가 동생 테오와 지인들에게 쓴 책과 일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서양 미술사에 관한 미학 책이 들려있었다.

역은 부산했다. 그것과는 아랑곳 없이 이른 제비 두어 마리가 낮게 날아서 어디론가 급히 날아갔다. 하늘에는 높이 솟아 제자리를 맴돌며 시끄럽게 우는 종달새 무리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점례는 죽마을에도 제비가 왔겠지, 종달새는 저렇게 지저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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