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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5 15:41 (목)
빈 도화지에 점례는 그림을 쓱쓱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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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도화지에 점례는 그림을 쓱쓱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18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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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끌려온 것을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 누군가 이 순간 떠나온 것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점례는 대답을 망설일 것이다. 이 상태라면 무언가 크게 잘못돼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를 만나 행복하다. 날마다 죽음이 곁에 오지만 널 보면 삶의 충만을 느낀다.'

장교가 느릿느릿한 말투로 꼭 해야만 할 말이라는 듯이 억양에 힘을 주고 말했다.

'죽으러 갔다가 살아 돌아온 느낌이 이런 것이다.'

장교는 거짓 없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가 이제는 일하러 가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점례는 복장을 챙겼다.

장교는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점례에게 맡겼다. 심지어 단추를 잠그고 군화를 신는 것까지 점례의 손을 빌렸다.

점례는 그가 나가고 연병장에 그가 탄 지프가 뿌연 연기를 날리며 끝에 있는 막사 쪽으로 가는 동안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서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엄마가 학교에 가는 막 입학한 어린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 마냥 점례는 그런 심정으로 장교가 막사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그를 도와줘야 한다는 강한 믿음이 점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가 기운 차릴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점례의 몫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 잘 되기를 기원하기 위해 점례는 창가에 세워둔 인자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장교 부모의 얼굴을 향해 두 손을 비벼 빌었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오랫동안 자신의 옆에 있어 그가 주기를 바라면서 점례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하는 일의 진척상황을 물어보지 않은 것을 다행이다. 더디거나 뒤로 밀려나서 앞으로 가지 못한 것을 걱정하는 그를 생각하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점례는 몸을 돌려 작은 나무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가 주고 간 화가용 노트와 잘 깎은 연필이 가지런히 있었다. 장교는 점례에게 자수를 뜨다 싫증이 나면 그림을 그려보라고 만주에서 화구를 한가득 사가지고 왔다.

자수를 잘 뜨는 것을 보면 그림에도 소질이 있을 거라면서 자신이 먼저 어떻게 사물을 보고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직접 그리면서 설명했다.

장교는 도쿄의 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원래 그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나 고위 정치인 출신의 아버지는 반대했다.

그것은 나중에도 가능하지만 법 공부는 때를 놓치면 영원히 할 수 없다면서 아버지를 따를 것을 원했다. 원래 심성이 착했던 아들은 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의실보다는 화실을 더 자주 드나들었고 수시로 스케치를 그렸고 그 위에 물감을 칠했다. 점례는 연필을 잡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선을 여러 개 그려나갔다. 그녀는 조선에 있을 때 미술 선생의 칭찬을 받은 걸 상기했다.

‘너는 그림에 소질이 있구나.’

선생님의 그 말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내 생각을 그가 눈치 챈 것일까. 점례는 자수를 뜨면서도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점례는 잡은 연필로 훈련하는 병사들의 모습보다는 산의 허리에 핀 진달래꽃을 화폭 가득 담아보고 싶었다. 똑같은 생각을 그도 하고 있을까.

점례는 어제 보았던 숙소 주변에 수도 없이 피어났던 노란 민들레 꽃과 땅에 붙은 그 꽃 주위를 돌던 커다란 색색의 나비들을 떠올렸다. 그런 것을 그린다면 그가 좋아할까. 장교는 점례가 어떤 그림을 그렸으면 좋을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점례는 그것까지는 장교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였다.

다가가도 꿀에만 정신을 쏟다가 뒤늦게 인기척을 발견하고는 날아가야 할지 계속 머물면서 꿀을 빨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비처럼 점례도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일단 스케치 두 점을 그려보기로 했다. 일장기와 욱일기를 들고 행진하는 병사들의 모습과 꽃과 나비를 그리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가장 좋은 소재라는 그의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렇구나, 두 개의 스케치를 내밀면 그가 어떤 그림에 더 관심이 있는지 알 것이다. 걱정을 덜었다는 듯이 점례는 화구를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다.

장교는 돌아오면 자신이 없는 동안 점례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성과물을 내놓고 싶었던 점례는 장교에게 잠깐 배운 스케치 기법으로 빈 도화지에 쓱쓱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토끼몰이에 나간 사람들처럼 점례의 연필심은 거침이 없었다. 사람들은 숨어 있는 짐승이 놀라도록 괴성을 지르고 냄비를 두드렸다.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깃발을 높이든 수 많은 병사들이 맞고함을 치면서 달려들었다. 점례는 일단 솟은 깃발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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