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례가 있는 곳은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요새의 장교 숙소였다. 외부에서 보면 안쪽은 전혀 보이지 않아 군부대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알 수 없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안은 상당히 넓어 시멘트 구조물이 무려 3동이나 자리 잡고도 여유가 있었다. 점례는 간혹 벽 사이의 뚫린 구멍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어떤 날은 문을 열고 나와 몸을 반쯤 드러내기도 했다. 보이는 아래쪽은 평지였다. 그쪽 어딘가에 며칠 전만 해도 점례는 있었다. 그곳이 어딘지 가늠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연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주위로 막사들이 공장처럼 일자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있는지 점례는 가름할 수 없었다.
병사수를 어림짐작 하자 점례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바람이 불었다. 모래 먼지가 산 쪽으로 몰려왔다. 점례는 피하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먼지는 이 쪽으로 오기도 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먼지는 뿌연 안개같기도 했고 땅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멀리서 먼지 사이를 뚫고 한 무리의 병사들이 열을 맞춰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훈련의 하나인지 어떤 계획인지를 짜기 위해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마치 뜨거운 불을 쬐기 위해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이라고 점례는 생각했다. 정확히는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점례는 두려웠다. 모여 있는 그들은 혼자 있을 때 보다 사나웠다.
그리고 저기는 너무 멀다. 그래서 위험하다. 점례는 다시 안전한 장교가 있는 공간으로 내려왔다. 장교는 이곳의 대장이었다.
그가 명령하면 병사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전투에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서 어디론가 계속 무전을 쳤다. 종일 쉬지 않고 그들은 번갈아 가면서 그런 일을 했고 그 결과를 장교에게 보고했다.
장교는 그러면 그것을 다시 정리해 직접 타이프로 쳐서 본국으로 전달했다. 이곳 전선의 상황은 그의 무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유리한 것이 상부에 올라기도 했고 때로는 불리한 전황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에따라 새로운 지시를 받은 그는 내용을 알기 쉽게 각 군에 전달했다.
어떤 때는 산을 떠나 만주에 직접 나가 이틀 이상 돌아오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가 외부로 나갈 때는 옷장에서 꺼낸 깔끔하게 다린 군복을 입었다.
날이 선 누런 군복에서 위엄과 권위가 느껴졌다. 이곳은 저 아래 연병장에 비해 다른 세상이었다. 과자나 과일 등 먹을 것도 풍부했고 옷도 마음대로 만들어 입을 수 있을 만큼 천이 넘쳐났다.
점례는 장교를 위해 일장기가 그려진 자수를 짰다. 그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 자신이 직접 해보겠다고 나섰다. 이 정도는 해보지 않았어도 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그도 휴의처럼 그렇게 했다.
휴의가 학의 얼굴에 붉은 실을 넣을 때 장교는 일장기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작은 상처를 냈다. 검지에 피가 한 방울 이슬처럼 뭉쳐 있었다. 얼굴을 찡그린 그는 화난 표정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점례가 다가가 입으로 나온 피를 빨았다. 시골에 있을 때 늘 하던 버릇이 나왔다. 엄마는 바느질 하다 찔리면 침으로 피를 닦아냈다.
그래야 상처도 아물고 빨리 낫는다고 했다. 장교는 그런 점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장교는 점례를 신뢰했다. 욕구를 만족 시켰을 때 나오는 은근한 표정이 얼굴 가득 배었다.
이곳에 점례가 있는 것이 당연한 듯이 여겼다. 되레 너무 늦게 온 것을 질책하는 마음이었다. 더 좋은 장소에 점례를 두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자신의 침실과 사무실의 한쪽을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러나 점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있는 곳도 충분히 좋다고 했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가 장교의 마음에 또 들었다. 행동이 점잖고 하는 말이 거슬리지 않았다.
장교는 도쿄의 집처럼 안도감을 느꼈다. 점례는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았는데 이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타고난 것이었다. 건축물로 말하자면 기초가 튼튼했던 것이다. 초소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지어진 것은 폭탄에도 견딜 수 있다. 이제 점례는 어떻게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만주 시내로 군용트럭을 타고 나갔다. 점례는 다시 혼자가 됐다. 그럴 때면 그녀는 책을 읽었다. 소학교 때 배운 일본어는 이제 일고 쓰고 말하는데 불편이 없었다.
불과 세 달 만에 장교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일본어 책도 마음대로 읽는 수준이 됐다.
오월로 접어 들면서 맞은편 산에도 새싹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사방에 연두색과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산의 이곳 저곳에서 야생화들이 피어났다.
나무들은 아래서 쉬어도 좋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잎이 무성해 졌다.
점례는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들어왔다. 연병장은 언제나 넓었다. 이쪽에서 저쪽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끝에는 절벽처럼 산이 깎였고 그 위로 송곳처럼 높게 솟아 있었다.
그곳은 아지랑이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득했다. 점례는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인파로 북적이는 만주 시내가 눈에 내려다보일 것만 같았다.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경성으로 가는 차도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마음이 이곳을 벗어나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에 갈 수 있을까.
점례는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앳된 얼굴이지만 눈가에는 너무 일찍 생긴 주름 같은 것이 보였다. 얼굴에 진짜 주름이 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