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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0:17 (금)
밤이 오면 낮을 어떻게 맞아야 할 지 모든게 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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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면 낮을 어떻게 맞아야 할 지 모든게 심란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11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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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잘 된 것이다.

들어갈수록 깊어지는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 이판사판 걸어볼 만한 모험이었다. 그것은 용희의 판단이 아니라 말수가 내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 용희의 마음을 움직였다.

‘감당해야 해’

말수는 그 말을 남기고 조용히 뒷문으로 사라졌다. 그날 이후 용희는 감당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겼다. 과연 나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무섭고 떨렸다. 발각되면 죽음이다.

등 뒤로 날아온 총알이 가슴을 뚫고 빠져나간다. 쏟아지는 피를 손으로 받쳐 들고 어찌할 줄 모른다. 버려야 할지 그냥 들고 있어야 할지 허둥댄다.

포탄의 파편이 얼굴에 박혀 그것을 빼는데 잘 빠지지 않는다. 그때 병사의 긴 칼이 목을 찔러 온다. 한 번에 잘려 땅에 떨어지지 않고 좌우로 건들거리는 목을 두 손으로 잡는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 오로지 용희의 몫이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다. 그 인내심으로 감당해 내자.

빨리 달리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말수의 조언에 따라 용희는 틈나면 방안에서 걸었고 제 자리 달리기를 했다.

달리기라면 자신이 있었다. 소학교 때 운동회서 일등을 한 적도 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늘 달렸다. 언덕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 했던 그 동작 그대로 용희는 발을 들었고 굴렀고 내 딛었다. 그러자 등을 뚫고 나오는 총알의 환영도 사라졌다.

몸에서 땀이 나고 다리에 근육이 붙자 살아야 한다는 의욕이 앞섰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지옥은 견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라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말이 생각났는지 용희는 그 말을 되 내면서 하루를 보냈다.

등 뒤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낭떠러지 아래서 위로 솟은 바위들이 뛰어내리면 받아주겠다고 손짓했다.

말수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계획을 세워서 온다는 그는 여러 날이 지나도 방문을 열지 않았다. 그가 죽었는가 체념하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왔다.

몹시 풀이 죽어있었다. 더군다나 팔을 다쳐 멜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탈출하려다 잡힌 동료 때문에 감시가 더 삼엄해 졌다고 했다.

도망치던 세 명은 잡혀 광산의 맨 앞에서 발파작업을 했고 그러다가 모두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그들은 인부들 앞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일부러 죽였다고 했다. 본보기로 너희 중 누구도 그러면 이런 꼴이 된다고 시범을 보였다는 것이다. 용희는 그러면 탈출은 없던 것이 되는가 하고 낙담했다.

말수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시간이 지체된 것뿐이니 조금 더 기다리자고 했다. 군함은 언제나 떠나고 기회는 찾아온다고 되레 성급하게 구는 용희를 달랬다.

그 말에 용희도 동감했다. 기다리자. 지금까지 참았는데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왔지만 떠나는 것은 말수처럼 자신이 마무리 짓고 싶었다. 말수는 돌아가면서 품에서 권총 한자루를 꺼내 주었다.

‘잘 간수해. 나는 숨겨둘 곳이 없어. 놈들이 늘 점호를 하거든.“

용희는 금속성이 주는 차가움을 느끼면서 권총을 받았다. 무섭다기보다는 왠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죽마을 해변가에서 동휴가 자신을 엎고 뛸 때 느꼈던 그런 당황하면서도 기분좋은 느낌이 들었다.

권총을 숨겨 놓고 나자 따로 준비할 것이 없었다. 가져갈 것도 없고 남겨둘 것도 없었다. 어제 죽었거나 오늘 죽거나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에게 그런 것은 사치일 뿐이다.

자유로운 몸으로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등에 멘 책보 때문에 덜컹거릴 이유도 없다.

책보를 생각하자 용희는 또 눈물이 어른거렸다. 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 한 권, 그리고 낡은 변또(도시락)를 허리에 감고 다녔던 그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리다 보면 책보는 흘러내리거나 앞이 뒤가 되기도 해 불편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젓가락 소리가 용희를 더 자극했다. 덜거덕거리는 그 소리는 때로는 박자가 되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 빨리 집에 가려는 마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용희는 들판을 달리고 언덕을 오르고 과부촌과 교회를 지나 학교 앞에 도착하는 그 모습에 울컥했다. 그리고 다시 탈출을 생각했다.

탈출에 필요한 어떤 것이 있을지 그리고 실패해 잡혔을 때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말수가 놓친 것이 있다면 자신이 대신 챙기고 싶었다.

필리핀으로 떠나는 군함에 승선하기만 하면 탈출은 절반은 성공이라는 말을 믿었지만 얼마나 긴 시간을 군함의 외진 곳에서 숨어 있어야 할지 그리고 뱃멀미는 어떻게 대처할지 고심했다.

들키지 않고 무사히 필리핀에 도착하면 그 뒷일은 어떻게 하고 먹고 자는 것은 그리고 밤이오면 낮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모든 것이 심란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꼭꼭 숨어서 흙이라도 먹으면서 살아있는 자신이 너무 좋았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평생 숲에서 나오지 않고 그냥 늙어 죽어도 좋았다. 옆에 말수가 있으니 심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용희는 줄 선 병사들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고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이런 생각 하면서 견뎌냈다. 보기 좋게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생각을 하니 없던 기운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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