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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4 14:03 (수)
타고 있는 불의 기운이 그녀의 마음을 포근하게 적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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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있는 불의 기운이 그녀의 마음을 포근하게 적셔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10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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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찌할 줄 몰라 찔러 총 자세를 한동안 유지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대신 방바닥에 떨어진 성경책을 발로 걷어찼다.

그 옆에 있는 목각 인형은 또 이건 뭐야 하는 억하심정으로 군홧발로 밟았다. 부서지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본인 병사는 했던 욕을 여러 번 되풀이 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초소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하늘에 별이 쏟아졌다. 신성한 것이 망가졌으나 점례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꿈속을 해맸다. 아궁이 앞에 앉은 점례는 솔잎을 집어넣고 그 위에 마른 장작을 서너개 얹었다.

그리고 성냥불를 긋고 바짝 불 곁으로 다가갔다.  손을 비비며 점례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타고 있는 불의 기운이 그녀의 마음을 포근하게 적셔왔다.

불은 잘 타고 있다. 장작에 옮겨 붙어서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작은 화산이 폭발하는 듯이 불기등이 솟아 올랐다. 의식의 저편에서 점례는 막사를 떠나 고향마을에서 저녁을 짓고 있었다.

무쇠솥이 끓고 밥익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일 나간 아버지는 아직 돌아 오지 않았다. 조선인 여자 하나가 점례를 안고 있었다. 눈을 뜬 점례는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초소의 장교는 간혹 찾아왔다.

그는 직접 전투 대신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그래서 쫒기고 살기띈 얼굴 대신 잔잔한 여유가 있었다. 한 번은 군용 실과 대바늘을 들고 왔다. 천조각을 들고 오는 날도 있었다.

그는 자수를 뜨는 점례를 위한 자신만의 방법으로 만족감을 표시했다. 진 빚이 있다면 갚았다는 시늉을 했다.

그 시각 남양군도의 용희는 말수와 마주 앉았다. 조선인 십장으로 일본군을 대신해 노무자들을 책임진 그는 다른 조선인과는 다른 신분을 이용해 용희를 만났다.

그는 용희가 말수가 적으면서도 강단이 있고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무엇을 도모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광산에서 곡괭이질을 하다가도 그것이 어떤 식으로 구체화 될지를 계획했다. 광산에서는 툭하면 사람이 죽어 나갔다. 부상자는 부지기수였고 일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됐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자 말수는 탈출을 꿈꿨다.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기에 자신은 너무 젊었다.

33살의 나이에 돈 벌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것이 후회됐다. 징집도 여러 번 피하면서 처세에 능하다고 여긴 자신이 미련스러웠다.

‘도망치자.’

그는 용희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렸다 나왔는지 심하게 떨렸다. 그것은 삶을 내걸고 하는 도박이었다.

잃어도 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 번 잃으면 만회할 수 없다. 용희도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입술 역시 바르르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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