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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기보다는 가볍게 다뤄야 한다고 초병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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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기보다는 가볍게 다뤄야 한다고 초병은 생각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09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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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을 손으로 잡기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는지 살폈다. 마치 잊은 소중한 물건을 찾는 것처럼 방의 구석을 돌아봤다. 작은 식탁 위의 성경책이 눈에 띄었다.

무릎을 꿇은 점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나직이 불렀다. 습관처럼 불렀다. 어떤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녀는 성경책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옆에 있던 작은 목각 인형을 잡았다. 닿고 닿아 거친 흔적이 사라진 인형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항상 같은 자세로 점례와 눈을 맞췄다. 그는 숭고한 어떤 것을 마주 보고 있는 듯이 조각상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는 안녕, 이제 안녕하고 작별을 고했다. 남겨질 자신의 흔적에 부끄러운 것은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무수한 빛이 반짝거렸다. 형용할 수 없는 빛은 사방에서 번개처럼 내리쳤고 그 빛 사이로 엄마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가타부타 말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에 휴의가 들어앉았다. 그는 엄마와 달리 다급한 얼굴로 손을 내밀고 달려왔다. 그가 점례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점례는 남은 한 손에 성경책을 집어 들었다. 이제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도피가 막 시작됐다. 그것을 감내하는 것은 오로지 점례의 몫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나이가 먹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열여섯 점례가 아닌 마흔세 살 점례가 됐다. 중년의 점례는 많이 살아본 사람답게 체념했다. 벽의 작은 거울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각 돌아가던 사병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서 있었다. 무언가를 궁리하는 눈치였다. 그 때 여기저기서 폭격 소리가 들렸다. 어느 쪽에서 공격하는지 가늠할 수 없어 그는 길가에 되는대로 엎드렸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에게 엄습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공포에 사병은 고개를 들고 초소 쪽이 아닌 점례가 머물고 있는 막사 쪽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너는 전쟁에 나간 병사의 공포를 아느냐고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안쓰러움은 사라졌다.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잠시 포성이 멈췄다. 그는 일어나면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달리기 선수처럼 점례의 막사로 향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잊은 물건을 다른 사람이 줍기 전에 그 장소에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뛰었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이것은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그녀를 존중하는 것은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다. 무겁게 취급하기보다는 가볍게 다뤄야 한다. 사병은 마음대로 생각했다.

얌전하게 굴고 미안한 마음에 자신이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조국의 승리가 절박했다. 곧 습격 나갔던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들이 전투에서 오면 자신의 차지는 없다.

장교라는 자의 동물성과 이기심이 배워야 한다. 그것이 전쟁터에 선 병사가 취할 태도였다.

그는 서둘렀다. 어깨에 걸린 총이 부자연스럽게 덜컥거리자 돌격 앞으로 하는 병사처럼 내려서 오른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앳된 얼굴의 어린 초병은 이제 더는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천황폐하의 이름으로 그는 발보다 먼저 총검을 들이밀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초병은 무언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태를 파악한 그는 총신의 끝에 달린 대검을 세웠다. 점례가 떨어져 내리면서 머리가 그의 얼굴을 때렸다.

사병은 씩씩대며 ‘빠가야로’를 서너 번 외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찌르려고 총 잡은 손을 뒤로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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