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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10-02 15:58 (일)
전황이 불리한 것인지 유리한 것인지 알지 못해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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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이 불리한 것인지 유리한 것인지 알지 못해 불안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05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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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손을 잡고 바다를 건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부여잡고 울고불고해도 소용없었다. 그래도 용희는 손에 잡은 성경책을 옆으로 밀쳐 놓지 않았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는 그냥 책을 펴고 아무데나 읽었다. 그러는 것이 나았다.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었다. 여러 번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장은 반질반질해져 있고 또 어떤장의 글씨는 흐릿해지고 했다.

성경책을 읽다니, 용희는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점차 이것도 익숙해졌다. 모든 것이 그랬다. 맞닥트리는 것은 모두 처음이었고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이국만리에서 작은 성경책으로 위안 받을 줄을 용희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도무지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날들이 쌓여간 후였다. 예쁜 옷과 질긴 고무신, 겨울에 언 손을 따뜻하게 감싸줄 장갑을 만드는 곳은 여기에 없었다.

그래서 용희는 때때로 주저앉고 가라앉았다. 그러나 산목숨은 질긴 것이어서 죽자고 한두 끼 먹지 않고 뜬눈으로 밤새도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었다.

비가 또 왔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비구름이 몰려들었다. 방해가 되는 것은 없었다. 하늘의 모든 물이 말라야만 비는 그칠 것이다. 멀리서 군가 소리가 들려왔다. 출병했던 장병들이, 훈련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돌아오고 있다.

그들은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 막사에 도착해서는 구호를 외치의 승리의 다짐을 빼놓지 않았다. 허리에 찬 긴 칼, 어깨에 걸친 번쩍이는 총구 그들은 그것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한다는 자만을 드러냈다.

어떤 때는 똑바로 서서 나무토막처럼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 오기를 기다려 용희에게 하나둘씩 다가왔다. 어둠의 자식들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도 없었다.

여기 한 달은 지금까지 용희가 살아온 전 세상보다 길고 질겼다. 부서지고 깨지고 넘어지는 그 긴 세월 동안 용희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인지 하늘에 대고 묻고 싶었다.

용희는 때로는 말수를 떠올렸다. 그가 주고 간 작은 성경책을 쳐다볼 때마다, 조선말로 욕을 하는 말수가, 비록 거칠고 사나웠으나 작은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밖에 없었다.

주먹밥을 먹고 나면 잠시 휴식을 했다. 군인이 없으면 밖에 나와 있거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비가 그쳤다. 찌는 듯한 더위가 찾아왔다.

이런 날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낮달이 저 멀리서 희미하게 빛을 냈다. 지금쯤이면 썰물 시간이다. 빠르게 빠져나가는 물을 따라서 용희도 바다로 나가고 싶었다.

물을 따라 영영 돌아오지 않고 바다와 함께 살아도 상관없었다. 고기잡이 배에 올라 동휴가 잡은 물고기를 손질해도 좋을 것이다. 언젠가 그날은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혔다.

동휴는 욕심을 부렸다. 아버지는 그런 동휴에게 내일 잡으면 된다고 그만하자고 다독였다. 동휴는 아버지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물에 걸린 고기를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배안은 고기로 가득찼다.

물고기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비늘이 떨어지고 살점이 뜯겨나갔다. 그런데도 동휴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나도 그런가. 그물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바로 나였다.

몸통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몸에서 수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용희는 쪼그라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미이라가 됐다. 박제된 신세를 바라보고 용희는 울기 대신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본군들이 들어왔다가 기겁을 하고 도망갔다. 용희는 깔깔 대고 웃었다. 미친년 소리와 칼집에서 칼이 빠져나오는 날카로운 금속음 소리가 들렸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용희는 자신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칼을 맞는다고 해도 또 죽기 밖에 더하겠느냐는 느긋한 심정이었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폭발음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전황이 불리한 것인지 유리한 것인지 알지 못해 용희는 불안했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내렸다. 그러자 바짝 마른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려운 시기였다. 용희는 동휴인지, 일본군인지, 말수인지 배 안의 싹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는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비가 내렸다. 천둥소리와 공습경보 사이렌이 화음을 내면서 섬 전체를 시끄럽게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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