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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0:12 (금)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오월이 멀지 않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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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오월이 멀지 않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2.24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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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저리나는 나날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굴복은 이미 오래전에 했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였다. 새장에 갇힌 새도 이보다는 나았다.

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금 나와라 뚝딱’ 외치면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가 필요했다. 순식간에 자신을 고향 죽마을로 데려갈 도깨비를 점례는 생각했다.

천장의 대들보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던 도깨비. 그가 나와서 방망이를 내리쳐 주었으면, 문을 열고 차례대로 들어오는 번뜩이는 두 개의 눈, 그 눈을 쳐 주었으면.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신선이 하얀 수염을 날리며 호통이라도 쳐 주었으면 점례는 그런 것을 기다렸다. 그때 한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점례는 잠시 들었던 정신 줄을 다시 놓았다.

왁자지껄한 저 소리는 적어도 일개 소대 병력은 될 것이다. 떠드는 소리로, 군홧발 울리는 발자국으로 점례는 줄지어 선 병사들의 숫자를 어림짐작했다.

그러면 그것은 대개 들어맞았다. 덜컥 문이 열리고 두 개의 눈이 발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어쩔 수 없는 것에 점례는 다시 굴복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정신을 어디로 모으고 버리고 할 형편이 못됐다.

바람이 불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오월이 멀지 않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봄의 들판에서 점례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이른 민들레는 벌써 노란꽃을 피웠고 더 이른 것은 하얀 왕관을 쓰고 더 센 바람을 기다렸다. 점례는 들꽃이 환하게 핀 마을 들판으로 나갔다.

보자기에 수를 놓기 위해서였다. 용희도 따라왔다. 둘은 언제나 같이 다녔다. 황토배기 언덕이 보이는 느티나무 아래서 둘은 자리를 잡고 멀리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꼈다.

땀을 뜨면서 점례는 점차 완성돼 가는 한 쌍의 학에 눈길을 주었다. 효의와 동휴가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무언가 가느다란 것이 볼을 타고 스쳐 지나갔다.

효의가 민들레 씨앗을 들고 점례 쪽으로 불었다. 점례는 뒤돌아 보았다. 동휴는 소여물을 줘야 한다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러라고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점례는 휴의의 장난이 미웠다.

용희는 모른 척했고 휴의는 수를 한 번 떠보자고 점례에게 말했다.

말과 동시에 점례의 손에서 보자기를 받아들고 휴의는 서투른 솜씨로 바느질을 했다. 휴의가 가고 비뚤어진 솜씨를 점례는 바로 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시간이 흐르고 점례는 일어나 앉았다. 점례가 있는 방은 뒤로 나가는 문이 하나 있었다. 점례는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막사 옆에 딸린 화장실 앞에서 그녀는 자신 또래의 조선 여자 셋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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