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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도 밤이었고 밤은 하나의 커다란 암흑덩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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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도 밤이었고 밤은 하나의 커다란 암흑덩어리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2.23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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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워할 대상은 멀리 있었다. 달나라 만큼이나 멀고도 멀었다. 그래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분노를 키울 힘이 없었다. 점례는 그럴 수 없었다. 효의도 동휴도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분노도 되주지 못했다 . 생명 없는 존재였다.

숨을 쉬고 있으나 점례는 이미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죽은 것은 자신의 몸뚱이뿐만이 아니었다. 혼도 나간지 오래였다.

낮도 밤이었고 밤은 하나의 커다란 암흑 덩어리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도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소총의 격렬한 반동도 점례는 애써 무시했다.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이미 죽은 육신이 사라진들 아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도 정신이 들면 눈물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볼을 타고 눈물이 입가로 흘러들었다. 마를 것 같지 않은 눈물은 점례의 슬픔이었다. 깊은 슬픔 속에서 그녀는 되레 그들을 동정했다.

인간의 눈이 아닌 짐승의 눈도 아닌 이상한 외계인의 눈으로 들이닥치는 그들이 처음에는 무서웠다. 그러나 지금은 무서움보다는 동정심이 일었다.

한결같은 모습의 그들이 나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면 좋은 일인가. 그러나 어이없었다. 그들이 내게 해준 것이 없는데 내가 그들을 위안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점례는 그들에게 인간이 아닌 하나의 물체였다. 그렇게 그들은 대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점례는 길을 잃었다. 눈을 감고도 왕복을 할 수 있는 길을 잃고 점례는 사방으로 헤매다녔다.

혼자 힘으로 도저히 집을 찾을 수 없다. 수호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밝은 불빛을 들고 앞장서는 신이 그리웠다. 넓고 포근한 등을 가진 수호신은 그러나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 앞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굳은 날에 바다를 건너는 어부처럼 그녀는 이리저리 허둥댔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몇 년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시간은 정지됐다. 아예 멈춰 서서 돌아가지 않았다. 고장 난 시계 속에서 점례는 한없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막사 밖은 꽃이 피었을까. 눈이 내렸을까.

점례는 도통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수 없어 괴로웠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났다. 군인들이 사람의 눈이 아닌 이상한 눈으로 점례를 노려봤다.

점례는 눈을 감았다. 먼 훗날 내가 이것을 회상할 수 있을까, 살아난다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전의 점례가 될 수 있을까.

점례는 움직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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