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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12-09 18:50 (금)
그 옆에는 점례 아버지가 구부정한 어깨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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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는 점례 아버지가 구부정한 어깨로 서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2.09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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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3년 3월 3일.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가로 세로의 무수한 주름이 새겨져 있었고 금세라도 커다란 거미가 나타나 실을 뽑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말하기 전에 실제로 거미가 얼굴에 붙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이마를 한 번 짚었다. 그때 태수는 손가락은 물론 손 전체가 얼굴처럼 심하게 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세월의 흔적은 얼굴만 아니라 몸 전체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후 할머니가 입을 열기 위해 마른 입술을 옴폭 거렸다. 초점 없는 눈은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가려는 듯 깊게 감겨들었다.

순사가 나타났다.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집안으로 숨었다.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온 것보다 더 빨리 달렸다. 긴 칼이 말 허리에서 박자에 맞춰 덜렁거렸다.

면에서 나온 순사는 조선인 하인을 데리고 죽마을에 도착했다. 오전 11시 였다. 마침 점례는 이웃집에 놀러와 있었다. 친구 용희와 바느질을 같이 하자고 전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점례가 용희네 초가 삼간을 들어갈 때 집 뒤의 커다란 소나무가 높이 뜬 해를 받아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금강송으ㄹ로 불리는 조선솔이었다.

‘1000년 된 소나무여.’

그 집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용희는 나무를 한 번 치어다보고 점례를 한 번 부른 후 토방으로 올라섰다. 그때 아이들이 순사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전에 용희는 말 울음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말은 소와 달랐다. 이 마을에서 말을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이 온다는 것은 순사가 온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이불 속으로 넣은 다리가 저절로 꼬였으나 점례는 호기심을 못이겨 문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용희는 점례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고리를 밀고는 얼른 문을 닫았다.

둘은 이불 속에서 밖의 동향을 살폈다. 소리를 통해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귀를 쫑긋거렸다. 정말로 순사가 왔다. 아이들 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무슨 일로 순사가 용희네 집에 왔는지 용희는 알지 못해 답답했다.

사립문 여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탉 한 마리가 황급히 닭장으로 달려 들어갔다. 상황파악이 빠른 용희 어머니는 닭을 쫓아 닭장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술상을 차리라고 말 안 해도 그러려고 준비하던 어머니에게 소리 질렀다. 순사가 말에서 내려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매서운 눈이 흙벽돌을 뚫고 점례와 용희가 있는 골방 쪽으로 두리번거렸다.

긴 장화를 벗지도 않고 들어선 그는 그 방을 발로 가볍게 찼다. 점례와 용희가 몸을 꼬면서 울 듯 말듯한 표정으로 이불속에서 숨죽였다. 그리고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방에서 나온 순사는 옆방 문을 열어 제켰다. 마치 제집에 온 듯이 열린 문을 잡고 순사는 용희를 불렀다. 그러자 두 여자애가 동시에 이불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쓱 한 번 훑어본 순사는 눈길을 용희 아버지에게 돌렸고 그는 용희와 점례가 동갑 나이 친구라고 서둘러 말했다. 순사는 용희 아버지를 데리고 점례네로 향했다.

대문을 막 열고 나가려는 순사에게 용희 어머니는 목이 잘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닭을 들고 순사님, 하고 불렀다. 순사는 금방 돌아와 먹겠다는 시늉을 하면서 오른손을 가볍게 들었다.

삼십 분 후 순사가 다시 용희네로 왔다. 그 옆에는 점례 아버지가 구부정한 어깨로 서 있었다. 방안에는 순사와 용희 아버지와 점례아버지 셋이서 종이 쪼가리 한 장을 앞에 놓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용희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용희야, 너 일본가서 한 일 년만 일하고 와라.’

순사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에 든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용희 아버지와 점례 아버지는 그 종이에 나란히 손도장을 찍었다. 손에 묻은 인주를 바라보며 두 아버지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각자의 옷에 쓱쓱 문질렀다. 흰옷이 금세 피라도 흘리는 듯이 붉게 물들었다.

‘도장 찍었으니 다 됐다.’

순사는 이 말을 마치고 말을 타고 다시 읍내로 떠났다.

16살 용희와 점례는 다음날 읍내로 가서 기차를 탔다. 가슴에는 옷가지 하나를 둘둘 말은 보자기를 안고서 그렇게 부모 곁을 떠났다. 1943년 이른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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