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154. 전망 좋은 방(1908)-조토의 질감을 기억하자
상태바
154. 전망 좋은 방(1908)-조토의 질감을 기억하자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2.01.31 1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드 코로나로 여행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다. 관련주들은 상승했고 직원들은 손님맞이에 바빴다. 그러던 것이 오미크론의 복병 앞에 푹 꺾였다.

상심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진다. 남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터. 이런 때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을 읽으면서 대리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울한 기분이 조금은 일어선다. 가라앉은 마음이 상상의 날개를 타고 이탈리아 피렌체로 날아간다. 거기가면 두오모 성당이나 조토의 그림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젊고 예쁜 루시와 그녀와 동행하는 사촌 언니 샬럿을 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영혼의 안식보다는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교회의 목사나 화가와 소설가와 거리의 바쁜 여행객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루시의 영원한 배필 조지와 조우할 수 있는 행운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이런 여행 뒤로 미루지 말자. 가지 못해야 할 이유가 더 많아지기 전에 속히 작품 속으로 ‘쏙’ 들어가자.

런던의 시골뜨기( 런던이 시골이라니, 그리고 품격과 아름다움이 있는 두 숙녀에게 ‘뜨기’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는 세계의 중심 이탈리아다. 그중에서도 르네상스 문명의 중심 피렌체가 아닌가. 그러니 런던의 시골뜨기 정도라고 격하해도 이해하자. 너그러움은 여행의 최고 덕목이 아니더냐. )

두 사람의 여행 이유까지는 적을 시간 없다. 우선 방에 도착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급하다. 우편으로 했는지, 인편인지 그도 아니면 전화나 이메일로 예약을 했는지 현지 펜션 주인의 말은 도착해 보니 달랐다.

전망 좋은 방이 아닌 겨우 집의 안뜰만 감상할 정도의 전망밖에 없다. 더구나 냄새도 나지 방도 서로 떨어져 있지 두 숙녀는 기분이 순간 잡칠 수밖에 없다.

기대하고 문 열고 들어간 방이 생각보다 나쁠 때 다들 상했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것이다. 들떴던 마음은 가라앉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루시와 샬럿은 주변에 누가 듣던 말던 이런 불평을 쏟아 낸다. 나무랄 일 아니다. 목사 아닌 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면 그래야 마땅하다.

한편 투숙객 가운데는 늙은 사회주의자 조지와 그의 젊은 아들도 있다. 이미 전망을 확보한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방과 맞바꿀 것을 제의한다. 이처럼 말도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여행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당연히 두 사람은 예의상 단박에 거절한다. 이때 목사가 끼어든다. 받아도 문제 될 것 없다나. 덧붙여 그것을 이유로 감사 인사는커녕 무엇을 요구할 사람들도 아니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그러라고 부추긴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전망에 더 민감한 사실까지 털어놓으니 바꾸지 않는 것이 되레 이상한 상황이다.

포스터가 묘사한 바뀐 방밖의 풍경은 이렇다.

“루시는 자기 방으로 들어간 뒤 창문을 열어 맑은 밤공기를 들이 마시면서, 아르노강에서 춤추는 불빛들과 산미니아토 교회의 사이프러스 나무들, 그리고 떠오른 달빛 아래 검게 웅크린 아펜니노 산맥 자락의 언덕들을 볼 수 있게 해준 친절한 노인을 생각했다.”

(그러면 이 방은 늙은 조지의 방인가, 그 아들의 방인가. 한번 생각해 보자. 이것은 나중에 루시와 조지 간 어떤 일이 벌어지고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떤 운명 같은 것과 맞물리고 있다는 작가의 복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밤의 풍경이 이러니 밝은 햇살이 비추는 아침에 깨어나는 일은 상쾌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여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기분으로 발을 딛는 피렌체의 여정은 보지 않아도 비디오다. 도시마다 있는 고유의 냄새를 맡으며 두 숙녀는 피렌체 거리로 나섰다.

상큼한 아침이슬이 아닌 꼬질꼬질한 냄새라도 좋다. 작가에 따르면 이탈리아에 오는 것은 깔끔함 대신 삶을 찾으러 오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본 조르노, 본 조르노’ 소리는 얼마나 듣기 좋은 억양인가.

그러다가 길을 잃고 회색빛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홀연히 나타난 안눈치아타 광장에 황홀해 하고 복제품으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성스러운 아기 조각상을 보고 도무지 맛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으깬 밤이 들어간 따끈한 빵을 사 먹는다.

둘이 얼마나 신나는 여행을 즐기고 있는지 상상이 간다. 거기다 산타크로체 성당 안에서 뛰어난 질감을 자랑하는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단테와 로렌초 데 메디치를 기억하고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을 찍은 사진을 산다면 이보다 도 좋을수는 없다.

그러다가 어젯밤에 방을 바꿔준 조지 부자를 만난다. 비에 젖고 제비꽃을 보고 수많은 인파에 휩쓸리고 베키오 궁전의 탑을 본다. 여기까지는 행복 그 자체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벌어진다. 시뇨리나 광장에서 살인 사격을 목격한 것이다. 두 남자가 돈 문제로 싸움을 벌이가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칼로 찔렀다. 조지와 루시는 그 광경을 함께 했다.

나이도 비슷한 두 젊은 남녀는 끔찍한 이 일로 인해 서로를 좀 더 알고 가까이 하는 계기가 됐다. 기절한 루시를 안고 있는 조지. 여행은 이런 것이다.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

그럭저럭 루시의 여행이 끝났다.

런던으로 돌아온 루시는 세실과 약혼했다. 결혼이 며칠 남자 읺았다. 그런데 그녀는 파혼을 결정했다. 여기서 우리는 루시의 당당함을 본다. 입센의 <인형의 집> 로라처럼 그녀는 더는 우유부단하지 않다.

▲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묵을 방이다. 그 방이 전망 좋은 방이라면 두말 할 것이 없다.
▲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묵을 방이다. 그 방이 전망 좋은 방이라면 두말 할 것이 없다.

예쁘고 품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단력까지 있다. 그녀의 결정은 세실 대신 조지를 사랑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딕 조각처럼 잘 생기고 강인한 어깨를 자랑하는 프랑스 성당의 문지기에 어울리는 중세시대 분위기를 풍기는 세실과 육체는 물론 영혼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습에 찌든 보수보다는 차라리 힘찬 몽상가의 자유가 그립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마음을 흔들면 여심은 그에 따라가기 마련이다. 루시는 조지를 택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예배당의 주례사처럼 죽을 때까지 같은 곳을 보고 같이 웃는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그들은 그리스 여행 대신 피렌체로 추억을 찾으러 떠났을까. 그리고 북향이 아닌 남향의 집에서 낭만과 사랑이 있는 전망 좋은 방에 묵으면서 그때 방을 바꿔준 인연에 대해서 웃음꽃을 피울까.

이야기는 길지 않고 짧다. 전망 없는 방에서 시작해 전망 좋은 방에서 끝난다. 그러나 빛나는 문장과 끝없는 웃음과 가벼운 발걸음은 여행자의 기분을 들뜨게 한다. 짜임새보다는 억지와 과장과 우연과 운명이 겹쳤다 하더라도 대리만족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렌체를 아직 가보지 못한 사람은 가기 전에 읽을 필독서로, 가본 사람은 웃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또 가기 위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분위기를 풍기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 이 소설은 여행의 들뜬 기분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여행안내서, 음식, 동행인, 호객꾼, 소매치기 등이 총 충동한다. 여행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담겨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이 있다. 누군가에게 이미 예정된 운명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남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 반드시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고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깔끔함보다는 삶을 찾으러 이탈리아에 온다는 말은 그래서 수긍이 간다.

목사가 놀림을 당하고 늙은 사회주의자가 아들의 사랑을 위해 열을 올리고 샬럿이 푼수 끼를 발휘해도 형편없는 작가가 그런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고 해서 흉볼 일이 아니다. 여행은 왠만한 것은 용서해 준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한다. 전망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작은 방에 있어도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 당신은 어느 쪽인가. 기왕이면 전망을 기억하는 사람이기를.

각설하고 피렌체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날을 기대해 본다.

혹시 알겠는가. 그곳에서 루시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나 푸치니의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듣게 될 줄을. 비에 젖고, 제비꽃을 보고 조토의 질감을 돌아와서도 영원히 기억하게 될지를.

제임스 아이 보리 감독은 1985년 이 작품을 기본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 루시 역의 헬레나 본햄 카터의 연기가 볼만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